예술작품의 내용에 관하여 - Herbert Read의 '예술의 의미'에 부처
- seungyonkimcomp1
- 2018년 5월 11일
- 2분 분량
이전에 일독 후 메모해 두었던 글임을 밝혀둔다.
1)
고대나 중세사회에서 예술은 어떤 독립적 작업이 아니었다. 이것이 근세를 지나 현대로 넘어오면서 예술을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나 어떤 개념의 표현과 전달로 보는 관점으로 변화된 면이 있으나, 개인적으로 예술은 커뮤니케이션이나 전달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왜 예술은 왜 커뮤니케이션이나 전달이 아닌가?
(1)
예술가가 예술작품을 통하여 어떠한 개념 내지는 관념을 전달하려 할 때, 그것이 과연 원래 의도된 의미대로 전달되는가? 이는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언어에 있어서도 흔하게 언급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도 아닌, 예술작품을 통해 개념/관념이 정확히 전달될 수 있겠는가?
(2)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점에 집중한다면, 그 중간에 놓인 예술작품과 그와 관련된 과정인 창작과 감상을 없애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전달이 될 것이다. 사고의 기반은 일반적으로 언어이므로, 언어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예술이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허버트 리드는 여러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도기에 대한 예를 들고 있는데, 앞서 밝혔듯이 그것은 당연히 표현이나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애초에 개인적 표현이나 소통을 중시하는 관점이 서구에서조차 몇백년 되지 않았다.
(3)
전달에 집중하지 않고 본다면, 예술행위에서 일어나는 과정에는 창작이나 연관적 사고, 감정의 촉발 등이 있다.
창작이라는 행위에 관하여서는, 많은 논의들이 커뮤니케이션적 표현이나 전통적 방식과의 관계와 새로움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 예술의 본질이 아님이 밝혀진 시점에서 당장 이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 않다. 다만 무언가 만든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가, 이 두가지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 만들어지는 무엇 에 대한 가장 중심에 놓여왔던 개념은 '미'이다. 그러나 그와 관계된 많은 정의들은 수많은 조건이 전제되며, 그 작용이 명료치 않다. 더하여 그것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왔고, 서구사회를 벗어난 경우에는 중요한 개념도 아니다.(서구사회의 '미' 개념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왔고, 이 '미'는 진리와 결부될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나, 동아시아나 다른 문화권의 경우에서 미는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개념과 그리 밀접한 관계에 있지 않은 개념이다.) 그리고 리드가 드는 예 중 하나인 원시사회에서의 미, 그리고 다른 여러 시대의 미 개념을 참조하면, 그것은 전혀 고정적이지 않다.
허버트 리드는 이에 대해, 사고가 언어에 의하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 용어의 정의를 보다 비한정적, 포괄적으로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나, 애초에 다른 것(다른 문화권의 다른 개념들)을 미 개념에 끼워맞추는 이전까지의 논의가 오리엔탈리즘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미'라는 것은 보편적 개념이 아니라 차라리 국지적인 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만일 미 개념 대신 쾌의 개념을 쓸 수도 있다. 쾌는 보편적 용어가 되지만, 다른 감각적 쾌와의 구분에서 쉽게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이는 어떤 추상적 개념 이전에, 감정에 기반하고 있으며, 미는 대상의 속성이고, 쾌는 개인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쾌는 미와 다른 것이지, 미를 대체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
예술 작품의 내용이 되는 '무엇'이 무엇인가에 대하여서는 후에 보다 깊게 논의하도록 하자.
다음으로 감정의 촉발에 대해서는, 일상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더라도 외부의 자극에 대해 보편적으로 감정이 함께 일어난다. 화창한 날씨나 꽃 등이 그것을 보고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을 느낀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그렇게 꽃을 피웠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무엇가의 자극-여기서는 주로 시각-에 반응하여 감정이 일어났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서술일 것이다.
이는 예술의 중요한 특성이다. 그러나 고유하지는 않다.
'무엇이 일상의 체험과 다르게 하는가'. 여기서 예술의 핵심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허버트 리드는 그의 책에서 톨스토이의 관점을 옮기고 있다.(p.285) 여기서 앞서 문제가 된 부분을 제외하고 언급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스스로에게 일깨우는 것, 그렇게 자신 안에 무언가를 불러낸 후에는 움직임, 선, 색채, 소리, 또는 언어로 표현된 형식을 통해 그 경험을 다른 사람들이 체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술활동이다."
상당히 뉴트럴하고 포괄적인 서술이 되는데, 이것이 얼마나 포괄적인가 하면, 종교적인 제의나 원시로부터 기원된 주술적 행위에서부터, 기념제 등의 역사적이고 공식적인 재연, 아이들의 단순한 놀이나 있었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가 포함될 정도로 포괄적이게 된다.(조셉 캠벨, 머치아 엘리아데 참조) 이는 예술의 종교적 기원에 대한 논의를 상기시킨다.(제도종교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뒤따르는 워스워즈의 이론은 이 예술적-제의적 활동이 어떤 작용을 하는가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 된다.
고대 제의의 목적 중 하나는, 제의의 의식행위를 통한 '신성한' 것의 체험과 그로 인한 고양이나 갱신 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신으로부터 개인을 향하는 흐름에서 비롯되는 소통에 가깝지, 개인과 개인사이의 소통이 아니다.
이러한 작용(?)의 비종교적이며, 자연과 연계시킬 수도 있는 해석은 들뢰즈로부터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후술) 그에 따르자면, 모방이라기보다는 이루어졌던 것의 반복이며, 그를 통해 깊이(그 주제 자체가 가지는)가 더욱 깊어진다. 이 도식에서 인간은 자연(혹은 세계)의 경계에 서서 그 외연을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역할은, 헤브라이즘(보다 정확히 그로부터 영향받은 신비주의)과 거의 동일한 관점이며, 그 작용에 대해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적 세계관에서의 예술론('세 번 곱씹어 다시 내놓는 것' 등. 이를 통해 하나의 주제의 깊이적 외연이 확대된다.)과 부합한다.
톨스토이의 예술에 대한 서술은, 리드가 언급한 것과 같은 부분적인 실수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리드가 '미' 개념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언어로부터 비롯되는 개념의 혼란과 부정확'을 기반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리드는 "톨스토이의 정의가 마티스의 진술에 부합하게 하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사실에 부합하도록 하기 위해, 나는 예술의 역할이 다른 사람도 같은 감정을 체험하도록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직 숙성되지 못한 형식의 예술의 기능에 불과하다. 예술의 진정한 역할은 감정을 표현하고 이해를 전달하는 것이다."(p.287)라고 언급하였다. 톨스토이의 견해보다 정확하나, 이도 역시 '전달'이라는 것에 묶여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이것이 옳다면 예술가는 이해를 전달해야 하므로 예술가는 또한 현명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카라바지오와 같이, 그 자신은 불완전하면서도 깊이 있는 예술작품을 남긴 예술가는 얼마나 많은가.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 것이 더 옳다고 본다: '표현(구현)을 통해 이해를 촉발한다'.
여기에서 나는 감정을 다시 삭제했다.
'예술작품이 어떤 신체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맞다. 우리는 리듬의 조화와 통일을 인식한다. 그런데 그러한 신체적 성질은 우리의 신경에 작용하지만, 신경을 부추겨 흥분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누그러뜨린다. 그 결과로 야기된 마음의 상태를 심리학적으로 정서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것은 예술가가 작품을 창조하면서 경험하고 표현하는 정서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 좀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인식의상태라고 하는 게 맞다.'
뇌의 작용은 감정과 정보를 완벽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한 뇌의 기제에 따라 인식에는 감정이 수반된다. 그러나 이해와 인식의 상태가 중요하다면, 왜 굳이 감정을 중심적인 위치에 설정해두고 언급해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에 따라, 감정에 대한 언급을 제하고(배제한다기보다, 그것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고를 넘어서서), 예술의 작용은 내용과 그에 따른 이해/인식의 촉발, 이렇게 두가지로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3)(내용에 관하여)
그렇다면 무엇이 내용이 될 것인가?
허버트 리드는 미의 개념의 통시적, 공시적 다양성과, 비획일적 예술, 비우열적 미 개념을 언급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미의 개념을 배제하고 정의 내린 크로체의 예술의 정의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 외에 '미=예술'의 부정확한 언어적 개념혼란 등 미 개념의 문제점과 한계, 예술과 미 개념 간 관계의 비직접성 등을 고려하면, 미의 개념 외부의 자리에서 예술작품의 내용이나 예술작품의 창작과 감상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미적 개념의 토대 위에서 이뤄진 논의들은 예술경험을 '미감을 통하여 미적인 것들을 발견하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미란 무엇인가'하는 정의와 그 외연을 넓히는데 천착해왔으나, 허버트 리드가 언급했듯 통일되지 않는 정의를 가지는 '미'라는 개념을, 선행하는 전제로 놓는 것을 피하고서 예술에 대해 언급하자면, 감상은 '예술경험을 통하여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의 무언가는 표현욕구를 통해 드러난다.
표현욕구를 전제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는 여러가지로 있으나 기본적으로 표현(혹은 무엇인가를 창조)하고자 하는 인간의 태도가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라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으므로, ('놀이', '펼침', 캠벨의 상상력, 욕구의 단계 등의 개념 참조) 이를 전제로 시작하는데 무리는 없으리라고 본다.
표현의 욕구는 무엇인가를 외부에 만드는 것, 외부로 드러내는 것이다. 외부에 만든다는 것은 그것이 내부에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감상은 그 표현욕에 따라 외부에 창조된/드러난 것,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이다.
여기서 '표현'이라는 표현에 집중하여 표현과 이해라는 틀에서 이 과정을 이해하게 되면 '예술=커뮤니케이션'이라는 도식으로 흐르게되고, 작품 자체보다 직접적으로 감상자에게 예술가가 접근하려는 태도로 기울게 된다. 그러나 이는 표현이라는 형식에만 집중한 것으로, 온전한 해석이라 할 수 없다. 표현한다고 할 때 우리는 '표현되고 있는 무엇'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내부에 있다는 표현은, 그것이 고유한 것, 원천적으로 완전히 (외부의 원천 없이) 내부에서 나온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이미 개인적이지 않다.
인류가 문화라고 할만한 것을 이루기 이전에서부터도(혹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기 전부터도)그 '외부'라는 것은 존재해 있어왔다. 모든 인간, 그리고 인류는 출발에서부터 외부의 영향을 받아왔고, 이 모든영향의 근원은 '외부'에 있었으므로, 그 영향으로부터 탄생한 '예술작품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의 근원은 당연히 한 개인에서 찾을 수 없다. (그 외부의 영향에 대한 해석 정도의 여지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 즉 '주어진 것'이다. (사실 철학의 전재론의 범주에서는 이에 관한 여러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겠는데, 세계 내에 존재한다고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감각대상과 의식 사이의 관계는 논의 상에서는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데 어려움이 있는 부분으로서 단정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문제가 따를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논의의 중심에 인간 자체, 혹은 인간의 능력을 두지 않고, 존재하는 것을 토대로 논의한다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후설-들뢰즈의 이론이 참조. 인류를 타자로 놓고 이루어지는 논의는 차라리 SF에서 더 활발한 것 같다.)애초에 사유의 중심을 사유하는 '나' 혹은 인간에 두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 생각된다. 이것을 종교적으로 보던, 생물연대학적으로 보던, 인간은 나중에 나타난 존재 혹은 종일 뿐이고, 세계를 사고하는 중심점으로서 인간을 두는 사고는 발달심리 상 유아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소위 감각되어지는 세계가 진짜인가 하는 논의는 반복되어지고 해결되지 않은 논의지만, 그것은 어떤 계의 내부의 것을 가지고 그 계 자체의 참 여부를 증명할 수 없다는 수학-논리학적 증명에 따라 이 세계는 그 내부의 인간으로서는 증명할 수 없으므로, 감각을 통해 지각되는 세계의 실재 여부는 증명이 불가능하다.
(여기서, 정보화 시대로의 발전으로 인해 이전과 같은 '진짜 같은 것의 실재 여부'가 아니라, 반대로 진짜같지 않은 것의 의미와 실재 여부가 이슈가 된 점도 짚어볼 만 하다. 시뮬라크르-시뮬라시옹 참조. 시뮬라시옹의 현상은 그 현상의 이면에 어떤 원리를 담고 있는(말하자면 '잠복해 있는 주체') 공허한, 혹은 스스로 반복하는 현상이고, 시뮬라크르는 공허한 것으로서, 반복 중의 하나 혹은 차이소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인간을 포함하는 세계는 인간에 대하여 감지가능한한 언제나 상대적으로 실재가 된다.(닫힌 계 내부에서는 옳은 것이 되는 것처럼. 이 계의 범주는 공리에 의해 잠정적으로 범주화된다 할 수 있고, 따라서 계 내부에 대해서는 언제나 참이 되는 공리와 같이, 세계의 존재는 세계 내부에 대하여 언제나 참이다.)
(이상의 차이는 동서의 차이로도 읽힌다. 배경적 논의로는 조셉 캠벨의 <원시 신화>중 농경사회와 수렵사회의 차이에 대한 내용, <사고의 지도>(?)에서 인지에 있어서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에 대한 내용 참조)
(조금 갑작스럽지만) 이상의 논의에 따라서 표현의 욕구의 대상이 되는 것, 예술작품에 표현된 내용 또한 '외재하는 것으로서 예술가에 의해 개인적으로 재해석된 것'의 관점에서 파악해야 하며, 예술작품의 감상과 체험은 예술가의 개인적 견해 이전에 예술가의 표현의 대상이 된 이미 외재하는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술작품의 창작은 ''외재관념'의 이해 및 그에 대한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지, 어떤 외재개념을 '드러내는 것'에 있지 않다.
(말하자면, 소설에서 등장인물이 작가의 가치관과 생각을 떠들 것이 아니라, 작가가 파악한 세계가 움직이는 방식에 따라 등장인물들이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이는 소설의 전개가 작가의 생각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얼마나 잘 근본원리를 이해, 파악하여, 그에 따라-혹은 적응하여, 그 원리에 맞게 일어나고 움직이는 것을 구현할 수 있는가 가 문제가 된다.)
여기서 '관념'이라는 것은 어떤 사상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현상 배후의 원리나 동인, 작용방식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따라서 예술가의 작업과 역할은 세계에 대한 개인적 관점을 작품에서 담론하는 데 그 역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능력에 따라 파악한 것을 구현하는 데 있으며, 그 감상은 그렇게 조직된(창조된) 것, 보다 특정한 주제에 중심을 두고 자연에서보다 더 명확히 그 주제를 드러내도록 조직된 것 경험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술작품에 내용이 드러남은,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 (들뢰즈의 '반복'개념 참조.) 따라서 '모방이기에 진정하지 못한 것'이 될 수가 없다. (만약 그렇다면 플라톤 식의 언급대로, 예술은 부정적인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인간 또한 그 그림자에 불과하여 부정적이 되는 것인데, 이는 근본적인 결함으로서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즉 인간이 소멸하기 전까지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리게 함으로써, 인간이라는 존재의 틀을 벗어나 순수관념이 되지 못하는 한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 되게 만들어버린다. (그 정점이 쇼펜하우어가 아닐까?) 들뢰즈가 이러한 근본적 문제, 부정-긍정의 문제를 잘 짚어낸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인간이 자연의 연장선으로서, 인간을 통해 자연에서 뒤섞인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더 명확히 정돈된 것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자연의 움직임의 방향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인간의 작업은 그것을 조건적으로 낮은 상태로, 즉 보다 명확한 상태로 드러나게 만들 수 있다.
여기서 다시, 명확하다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어떤 개념이나 관념을 드러냄에 있어서 그 본질을 훼손할 정도로 단순화가 이루어진 것은 명확한 것이 아니라 거친 것이다. 복잡한 개념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다만 잘 유기적으로 조직화 할 수는 있다. 즉, 명확하다는 것은 핵심 내용을 드러내도록 유기적으로 잘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지, 핵심 내용의 복잡한 부분을 쳐내어 단순화시킨 것이 아니다.
<경험(체험)으로서의 예술과 그 감상의 세부에 대하여>
예술체험 - '직관적 이해'
'예술은 직관적 이해에 호소하는 것임을 반드시 기억해 두자.', 그리고 또한 '예술작품을 의도적으로 오직 설명의 방식으로만 분석한다면 예술이 주는 쾌감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와 같이 기술한 허버트 리드의 관점이 예술작품의 감상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직관이라는 것에 대하여, 직관은 논리적 사고에 완전히 의존하는 것도, 즉흥적인 감정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먼저 분명히 해 두어야 하겠다. 직관은 단순히 논리적 비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숙련 등으로 인하여 의식적인 사고과정을 뛰어넘은 것처럼 느껴지는 사고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직관의 힘> 참조)
감상자는 이 직관을 통하여 예술작품을 경험함으로써, 세부적인 사고과정에 대한 인지 없이 급작스럽게 느껴지는 작품에 대한 고도의 총체적인 이해가 밀어닥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이해는 사고의 중간과정이 의식적 인지 바깥에 있으므로, 쉽게 주관적이거나 감정적, 혹은 즉흥적이라는 오해를 받지만, 사고의 과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의도와 의식 바깥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한다. 이는 감상자의 주의의 바깥에 있지만, 감각에서 촉발되는 사고과정이긴 하므로, 반복과 훈련을 통하여 보다 깊은 지점에 도달할 수 있으며, 예술작품으로부터 보다 정묘한 쾌감, 보다 깊은 감동을 얻기 위해서 필요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연주자가 반복훈련을 통하여 보다 높은 경지의 테크닉과 표현에 이르는 것과 같으며, 이러한 훈련이 필요한 것은 연주자 뿐만이 아니다.
허버트 리드(Herbert Read)의 미감의 흐름에 대한 서술로부터 '미'라는 용어를 제하고 감상의 흐름을 도출해보자면,
감상은 감각을 통하여.
감각정보의 패턴 인지.
그로부터 정보를 얻음.
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전체과정은 인간의 정신활동에 속하므로 기본적으로 뇌가 감각자극으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는 인지의 과정에 기본 바탕을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며, 음악감상 혹은 예술감상의 과정은 그 외의 영역에서 감각정보로부터 정신활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다.
즉 1)감각과 지각, 2)패턴인지, 3)정보로 변환되며 정서나 감정과 결부
세번째 단계가
뇌과학적 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사고는 감정과 결부된다. (사고는 신호들, 신호패턴들의 결합이며, 이 신호, 뇌세포들의 활성은 감정과 연결된다. 따라서 완전히 감정이 배제된 사고를 보장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p.25 참조)
이 지점은 특유의 추상매체인 소리로 구성되는 음악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쉽게 느낌이나 감정표현과 결부되는가를 설명해준다.
- 상징에 관하여
뇌의 특성 때문에, 정보와 기억은 감정과 결부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의 인지, 인지된 정보의 상기(recall)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상징은 그 자체로 특정 감정을 표상하고 있지 않더라도 어떤 주관적이고 개인화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로저 프라이(Roger Fry)의 언급도 참고할 만 하다. '내 생각에 예술은 우리의 감정을 움직이는 어떤 특질을 가진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단순히 질서와 상호관계에 관한 지각만은 아닐 것이다. 구성의 모든 부분은 전체적으로 정서적 색조로 가득 차 있다. 앞서 내린 순수미의 정의에 따르면, 이 정서적 색조는 삶의 정서적 체험을 지각할 수 있는 회상이나 연상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 예술은 삶의 모든 정서적 색채의 토대에 다가가거나, 특별하게 한정된 실제 삶의 정서들 밑에 잠재된 어떤 것에 다가가는 것처럼 보인다.'
각각의 예술작품은 종교나 철학 등의 다른 체계에 기대든(종교화나 종교적 상징주의, 세리얼리즘이나 근대적 이즘들에 의한 작품들), 아니면 그 내부의 고유한 체계를 갖든(대표적으로 음악, 각 곡이 가지는 개별화된 모티브들), 어떤 상징체계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서 상징이 '(우리가 인류학이나 종교학에서 배웠듯이 상징이한 아주 자의적인 기원을 가진 하나의 형식임이 분명하다.) 상징은 애매모호하고 주관적인 정서를 모양과 명확함을 가진 어떤 것으로 구체화한 것이다.'(p.70)라는 리드의 언급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것이 앞의 서술을 명확히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리드는 정서가 구체화 된다고 언급하였으나, 앞서 논의한 대로, 정서를 중심으로부터 밀어내고, 중요할 수는 있지만 핵심은 아닌 수반되는 어떤 것으로 놓고 보면, '상징'은 무언가 구체화된 것, 어떤것이 구체적인 것으로 대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음악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상징하는 주제나 모티브, 악기음색, 혹은 추상적인 소리-시간의 움직임을 대변하는 구체적인 모티브 등과 같이 표제음악이건, 절대음악이건 간에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익숙한 방식이다. 여기서의 중요한 것은, 흔히 '정서'로 다루어진 것이 무언가 핵심적인 것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핵심적인 것을 암시하는 '표면'으로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정서, 혹은 상징으로서의 어떤 구성요소들은 구체화/조직화되며 예술작품 내에서 일어나는 핵심적 사건의 표면이자 재료이다.
'예술가의 실제 작업에서 형식은 지성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특정한 방향을 향해 가는, 그 범위가 한정된 정서이다.' - Herbert Read, 예술의 의미, p.27
# 형식에 대하여
구성-형식은 구체화인 패턴의 정점에 있다.
그것은 쉽게 인지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패턴들로부터 점차 복잡한 무늬를 만들며 형성된 복합적인 층위를 가지는 상위를 통해 구현되는 총체이다.
(소나타형식- 두 개의 대립적인 주제로부터 짜여진 형식의 발달 끝에 나타난. 통절적인 그레고리안으로부터 출발하여 어떻게 발달되었는가를 추적하면, 더욱 소나타 형식의 이상이 분명해진다고 볼 수 있다.)
상위-개념으로부터 하위-실제 형식으로 전개된 것이다. (이 '방향성'은 리드가 보는 것과 반대일 수 있다.)
구성원리와 핵심내용이 그것이 드러나는데 필요한 무늬-패턴(-주름)들을 그리며 계열화하여 실제 작품, 작품의 구성-형식으로 드러난다.
'군더더기 없이 잘 짜여진'
군더더기 없다는 것은 단순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단색화가 가장 조형적으로 완벽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사실 여기에는 전제가 필요하다. '군더더기 없음'을 판단할, 이 부분이 필요한 부분인지 아니면 불필요한 부분인지를 판단할 기준 말이다. 이 판단은 내용이 무엇인가와 관련이 있다. '이 부분이 핵심적인 내용을 적합하게(적합한 호흡으로) 드러내고 있는가'이다.
정리하자면, 형식 그 자체는 기준이 될 수 없으며, 무엇을 내용으로 하고자 하는가에 따라 적합한 구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내용이 적합한 구성-형식을 결정한다.
정형화된 형식은, 시대와 지역의 이상에 따라 공통적으로 나타난 내용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정형화된 형식에 비추어 형식을 논하는 것은 무용하다. (형식 그 자체로는 공허하며, 그것은 내용에 따라 좌우된다.)
전체적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예술작품은 경험하게 하는 것이며, 감각을 통해 이해를 촉발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외재하는 개념.
이 개념은 세계 안에(예술가의 밖에. 혹은 예술가의 안이 아닌 세계 바깥으로부터 주어져 세계 안으로 들어와) 위치하고 있다.
그것을 조직화한 것이 예술 작품이며,
그것이 '얼마나 그 개념이 잘 드러나도록 (혹은 그것이 잘 체험될 수 있도록?) 구현되었는가' 가 기준이 된다. (그 개념이 드러나는데 도움되지 않는 부분은 좋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곧 구성-형식이 된다.
이에 대해 들뢰즈의 관점을 끌고오면 보다 명확해진다.
원래 외부에 존재하고 있던 개념 자체가 어떻게 예술가를 통하여 그 자체 개념을 예술작품 안에서 반복함으로써 깊어지는가. 이것은 또한 왜 그렇게 같은 주제가 여러 시대의 예술 안에서 반복적으로 다뤄져 왔고, 시공을 건너서 동일하게 나타나는가 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중국회화의 전통대로, '반복될수록 깊어진다.'
2018. 5. 11.
KR © 2018 김승연(Seungyon Kim). 출처 표기 인용 가능 /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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