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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Sae-ahm Kim

essay

20C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의 개념에 기반한 비교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 1944~)의 ≪축의시대≫는, 고대 여러 문명의 현자들의 고민과 사유를 담은 저작이다. 인간사회는 일정한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적 체계를 기반으로 하였으며, 석기시대의 직접적 관계가 이루어지는 부족사회 이후, ‘국가’ 혹은 ‘민족’으로서의 의식이 생긴 시기 이후의 사회적 문제—직접대면하지 않는 이들과 민족•국가라는 큰 공동체를 형성하며 사회라는 체계를 구성하여 삶으로써, 사회의 문화•의식•체계 등의 수준과 상태에 개개인이 고스란히 영향을 받는—는 지금 현재에까지 해결되지 못하고 여전한 사회적 문제로 존재하고 있다. 이에 대한 현대의 많은 지식인들과 의식있는 이들이 사회가 당면한 문제에서부터 근본적 문제까지, 많은 논의들을 제기해왔지만, 그 논의의 복잡성이 사회 복잡성의 증가에 따라 더 복잡해졌을 뿐, 근본적으로는 고대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야스퍼스, 그리고 암스트롱이 ≪축의시대≫를 통해 조명한 고대의 현자들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다양한 측면에서의 사유들은, 현대에도 여전한 문제이다. 여러 국가•집단의 생존문제부터, 다른 가치관의 갈등, 폭력성, 부패와 소모, 사회적 허위 등은, 국제사회의 자국우선주의와 다원사회의 갈등, 혐오이슈, 여전히 만연한 전쟁, 정치와 경제의 부패와 소모, AI와 비인간성, 환경문제, 정치•사회적 은폐와 선동, 사기와 가짜뉴스 등으로 현재에도 여전하다.


  인간은 나아질 수 없다.


  현자들의 목소리 중 아마 가장 기대되지 않았을 부분은, ‘현실을 알아야 한다’일 것이다. 현자의 금언이라면 모름지기 고차원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리라 기대될 것이다. 그러나 핵심적인 내용 중 두 가지는,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와 ‘현실에서 행해야 한다’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인식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동물로서, 육체적•물리적 생존, 그리고 생존위협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고로, 인간은 나아질 수 없다.


  정정하자면, 인간은 나아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나아질 수 없다. 그렇기에, 현실의 인간사회는 사회가 나아진다는 환상을 생산한다.

  하다못해 ‘르네상스’, ‘근세’ 등의 역사적 명칭조차, 우월감과 잘못된 환상에 기반한 명칭이다. 중세는 암흑기이자 과도기이며 르네상스는 부흥이고, 어떤 시대는 모던하고 어떤 시대는 그렇지 않다, 라는 메세지를 함의한다.


  이 모든 것은 ‘현대’—그것이 지금이든 수백년 전이든—지금에 내재한 우월감이자, 지금의 문제와 무지함에 대한 은폐이다. 이것은 하나의 거대서사이다.


  생존은 체계 없이 불가능하다. 하다못해 역사 이전 조차, 부족에는 나름의 체계와 문화가 있었고, 어떻게 식량을 구하고 자연의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체계가 있었다. 현대사회는 그 복잡성만큼 더 크고 깊고 복잡한 체계가 존재한다. 최근에는 ‘거대담론이 무력해졌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크고 더 무자비하며 세계를 휩쓰는 담론은 은폐되었다. 모든 것이 수익으로 환원되는 자본주의는 기술을 장악하고 AI를 통해 일상영역까지 침투하고 있다.


  그 모든 체계는 필수적이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 모든 체계는 ‘필요’에 의해 발생한 것이지, ‘인정’이나 ‘드러냄’을 위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 자체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 개인의 역량을 평가하고 라벨링하기 위한 것, 무언가를 ‘홍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느새 전도되었고, 이는 곧 AI에게 거의 모든 측면을 추월당할 것이다. 인간은 유능을 위한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협력과 집단의 문제 해결에는 유능함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유능함 자체는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며, 직접적인 해결이 아닌 한, 그것은 또 하나의 시뮬라크르, ‘인간상품 이미지’에 다름아니다. 의식없는 문화의 망령인 ‘상품성’이 대중성이라는 탈을 쓰고 세계를 휩쓸었고, 이제 유능한 AI라는 아방가르드—자본기술의 전위부대가 일반 사람들의 삶을 덮칠 것이다. 이제 적어도 수십년간은, 대기업과 인공지능 기술을 가진 회사의 후계로 태어난 이들을 제외하고는, ‘하찮고 대체가능한’ 인간으로서의 삶 외에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일반적 젊은 세대는, 열심히 공부하여 사축—회사의 가축—이 되는 길과, 그에 실패하여 골방에 처박혀 살거나 길거리를 배회하여 도태되는 길, 두가지만을 제시받고 있다. 이들에게 ‘인간다움’은 금수저의 고민일 뿐이다.


  가령, 2014년 『빈곤 · 불평등 추이 및 전망』에서 김미곤 보건사회연구원은 90년대 중반 절대빈곤 3%, 상대빈곤 9%를 기록했던 빈곤률이 21세기 들어 2012년까지 절대빈곤 8% 내외, 상대빈곤 14% 내외를 기록하고 있다며 “1인당 GDP는 크게 증가하였지만, 절대빈곤율과 상대빈곤율은 1990년 중반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지수를 보수적으로 ‘낮게’ 잡는 한국의 특성 상, 그 지수는 실제적으로는 더 높을 것이다. 곧, 길을 갈 때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여러 절대적 빈곤인들을 마주치지 않는 것에서 이 사회의 빈곤이 옛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사회의 상업적 환상 속에 사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카푸어, 하우스푸어, 코인푸어 등, 희망없이 남겨진 죽음까지의 삶에 대한 대안으로 일확천금, 혹은 자포자기적 쾌락소비, 허영과 과시적 소비 같은 희망없는 대안에 이끌려 완전히 망가진지 오래이다. 10여년 전에 이미 수많은 대학생들—심지어 서울대생들조차—‘공시’에만 희망을 두었으며, 그것은 ‘로스쿨’을 거쳐 ‘의전원’으로, 그리고 이제는 ‘의대’로 바뀌면서, 타단대는 입시학교로 전락해가는 중이다. 그리고 이제 의사정원의 대규모 확대로 사회에 많은 수의 의사가 ‘보급화’ 되면 그후에는 또 다른 영역이 타 영역들을 빨아들이며 젊은이들을 대체가능하고 아무것도 보장되어있지 않은, 그러나 그 대체가능한 한자리를 얻기 위한 기회조차 30년을 바쳐 공부해야 하는 길로 내몰 것이다.


  하찮고 대체가능한 삶.


  한국 사회는 망가진지 오래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성과를 내지 못하면 안정적인 삶을 결코 누릴 수 없는 것처럼 교육받았지만, 입시와 스펙에 모든 것을 갈아넣어도 최소한의 안정이라도 남은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사회는 그저 각축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에 절망한 세대이다. 이 세대는 그 티끌만큼 주어진 것이라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발악하거나, 티끌같은 인간성에 자포자기하는 것만이 남은 세대이다. 이 세대의 기조는 명확하다. ‘스펙이라는 성과를 내지 못하면 너는 인간도 아니다’, 그러므로 사회에 존재하는 이들이 그 자리의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너는 인간도 아니다’.


  한국사회, 그리고 인류의 미래는 명백하다. 개인이 존중받지 못한 세대는 그 누구도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는 현실과 절망을 외면한 시대이다. 경제 뿐만 아니라 법과 정치조차 이미지 아래 굴복한지 오래이다. 모든 파국은 상업적 이미지 아래 은폐될 것이다. 이제 AI의 등장으로 AI보다 뛰어난 아웃풋을 낼 수 있는 극소수의 천재들을 제외하고는 사회로부터 AI보다 나은 ‘인간적 대접’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이후에 인류가 존속하고 과거에 관심을 여전히 가진다면, 이 세기는 마치 지난 일본 경제를 ‘버블 경제’라 부르듯 ‘허황된 이미지의 세기’라 불릴지도 모른다.


  이제 기존에 존재하던 담론에 기댈 수 있는 세기는, 20C와 함께 저물었다.


  스스로의 담론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생존의 방법이다. 더이상 사회는 인간의 신체적, 육체적 생존을 담보하지 않는다—그것을 담보하지 않음 위에 사회가 구성원들을 신경쓴다는, 그리고 국가가 국민들을 신경쓴다는 이미지만을 양산할 뿐이다.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길 포기하고 인간의 육체를 보존할 것이냐, 일신의 안정을 포기하고 인간으로서의 정신을 지키려 애쓰다 죽을것이냐, 이 두가지 선택지만이 남아있다. 기존의 가치체계, 세계관, 인간에 대한 믿음은, 현실에 도래한 강력하고 다각적인 반례들 앞에 무너졌다. 존재 자체가 무너지지 않으려면, 인간을 긍정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라, 긍정을 창출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생존이 될 것인가는 그가 진실되게 탐구할 수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상품적 이미지 획득을 위해 노력했는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제 타자를 긍정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그 누구도 온전히 인간적 삶을 영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9번 교향곡에서 인류와 신, 세계의 위대함을 노래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위대함은 최고의 위선에 다름아니다. 찌질한 이들이 거들먹거리며 ‘스웩’을 부르짖었던 것은, 정신적으로라도 인간에 절망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십여년 전만 해도, 아이돌은 우상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사회적 기준에 ‘남에게 예쁘게 보이는 것’ 대신, ‘사회적 기준을 무시하고 스스로’ 거들먹거리는 힙합이 유행하더니, 트롯을 통해 과거를 소환하다가, 이제는 가상 속으로 숨어버렸다.


  이제 인간에 대해 긍정할 줄 아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그것이 고작 정신만이자, 고작 자위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II.

이제 모든 개개인은 제대로 된 시스템의 도움 없이, 이 한 생을 살아야 하고, 그 스스로가 자신을 포함한 인류 전체의 존엄함을 찾아야만 한다. 인간 존엄에 절대성을 부여했던 종교, 사상, 문화 등은, 제도종교의 오염, 사상의 중심인 대학 및 학계의 직장화와 회사화, 문화의 상품화로 그 체계는 모두 시뮬라크르의 일부가 되었다(그리고 이제야 사람들은 기업화되지 않은 정신적 지도자를 찾기 시작했지만, 절실한 사람들은 모두 굶을 위험 속에 찾을 시간이 없고, 찾을 시간이 있는 이들은 쇼핑하듯 종교•사상•문화를 ‘구매’한다).

‘인생샷 찍으려 2시간 기다려도 좋아.’ 이것이 뉴스의 보도 제목이 된 시대이다. 내가 먹는 것, 입는 것, 가는 곳과 사는 곳, 내가 삶에 마주하는 하나하나를 만들고 의미 부여해야만 가까스로 정신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대이다. 사회에 바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는 자본주의에 정신이 절여진 이들 뿐이고, 의식있는 사람은 도태되는 세계이다.


  이제 인간 정신은 생존의 문제이다. 19C까지 누구도 이렇게 문명 그 자체가 디스토피아가 되는 세계를 그리지 않았다. 20C에는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고도 누구도 이 세계를 멈추고 싶어하지 않았다.


  우리는 조상을 탓해야 한다.


  인류 자체의 무지함을 탓해야 하고, 짐승같은 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도 기고만장함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간 의식을 감독해야 한다. 그럼에도 의미있는 것이 진실로 ‘가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거짓되지 않은 희망’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허황된 위대함을 원하지 않는다.


  과장된 유능, 허황된 가치, 선동된 희망과 같은 것들이 여전히 현대사회 안에서 유령처럼 떠돌아 다닌다. 그러나 현실을 체감해본 그 누구도, 어딘가에 정말로 유능한 누군가, 세상을 일거에 변혁시킬 누군가, 그도 아니면 희망이 될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제 대부분의 인간에게 남은 것은, 한미한 존재 그 자체, 몸뚱아리 하나 건사하는 것 그 자체 뿐이다.


  소박함, 자연스러움, 인간 본연의 조건과 가치.


  이 모든 것은 세상에서 가장 지켜내기 어려운 것이다. 인간 자체를 지켜내기 위해 인류의 정신적 스승들이 무엇을 희생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가장 단순한 것은 가장 어려운 것이며, 가장 무시받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것이다.


  어둠 속에 스치는 희망을 담은 2011년 ≪Luxification≫, 2016년 해체된 인간과 의지를 그린 ≪Trace of Time≫ 에는 ‘잘 모르겠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오히려 그 어떤 위대한 순간도 없이, 회상과 슬픔, 소박함과 죽음과 생의 몸부림에 대한 관조만을 담은 작품에 대해서는 반응이 돌아왔다. 이제는 허황된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하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III.

  19세기까지 근세는, ‘미’와 ‘적절성’의 시대였다. 비례적인 ‘미’는 사실 ‘적절성’에 다름 아니다. 인류는 세계 전체의 야만성이 폭로되는 사건인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나서야, 인간에게 ‘미’라는 것이 불가능함을 의식했다.

  그러나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에 따르면, 20세기의 아방가르디스트에게서 조차 ‘적절성’을 갖춘 ‘미’에 대한 천착은, 은폐된 채로 계속되고 있었다.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는 미학의 영역에서 이를 받아들여, ‘20세기는 숭고의 시대’라고 기술한 바 있다. 음악에서는 보다 최근에 각광받고 있는 음악사가 리처드 타루스킨(Richard Taruskin, 1945~2022)에 의한 20세기 초중반의 음악사에 대한 기술에서 이러한 인식을 찾아볼 수 있다. 철학에서는 프랑스 현대 철학이 일찍이 시각적인 인식과 미감을 벗어나, 신체성, 현행성의 생동, 생성 등에 주목한 바 있다. 그러나 20세기 전반적으로는 광고와 프로파간다, 가비지 정보와 같은  시뮬라크르가 현격하게 증가한 시대이다. 이 시뮬라크르는, 제국주의, 그리고 이 제국주의를 이어받은 자본주의적 논리에, ‘미’라는 것, 그리고 ‘적절성’이라는 것이 종속적으로 결합하여, 지금 시대의 일상 모든 영역에 깊숙히 들어와 있다. 이는 보다 일찍이 니체가 주목한 바와 같이 사회와 문화의 체계가 실제를 은폐하고 있으며, ‘적절성에 따른 미’라는 것이 그러한 자본주의의 시뮬라크르적 프레임의 첨병으로서 현실사회에서 수행하고 있는 은폐이다. 얼마 전(혹은 21세기 어느 시점에) 유행하였던 ‘얼굴 천재’, ‘갓(God)(아)기’에서부터 ‘자본주의적 엉덩이(골반)’, ‘자낳괴(자본주의가 낳은 괴물)’ 등, 인간 신체에 대한 상품화를 통한 미감과 자본주의적 소비의 결합에 의한 표현들이 공공연하게 소비되며, 그것이 문제로 여겨지는 대신 사회에서 그 존재가 수용 가능한 것이 아님에도 그 존재를 수용‘당할’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러한 사회적 양태가 애초에 사회 구성원들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 양 넘어가도록 무마하거나 은폐하는 이러한 표현들은 사회의 ‘자본주의 문화’의 예시이다.


  20세기에 이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가 자본주의 상업 이미지의 문제점을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을 통하여 조명했고, 많은 다른 지식인들도 그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지만, 21세기에는 ≪이기적 유전자≫와 같이,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영역에서 조차, 자본주의의 정당성을 옹호할 수 있는 저술과, 기업의 후원을 받은 연구실의 수많은 양산형 연구 및 논문들이 아직 사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21세기 초반을 무수히 횡행하고 있다. 리오타르는 20세기가 ‘숭고 미학의 시대’라고 했지만, 정작 20세기와 지금 21세기는 ‘인간존엄과 숭고의 실패의 결과’라고 해야 할 지경이다. 세계에 현재 횡행하는 전쟁과 억압, 착취, 그리고 한국에 횡행하는 무지와 기만, 은폐는 인간이 존엄성을 가진 존재인지, 야생의 동물무리와 다를 것 없는 존재인지의 구별을 어렵게 한다. 이것이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러시아, 중국, 인도 등의 세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며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가진 나라들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현실과 미래는 명백하다.

  

  자본주의는 이제 보통사람들은 그 원천에 접근할 수 조차 없는 ‘AI’를 전위부대—아방가르드로하여 인간의 생존의 영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중반에, 작곡가의 주체적 역할에 대한 견해차를 보이며 갈라진 존 케이지와 피에르 불레즈 사이의 일화는, 이전의 제도화된 사회의 유능과 주체로서의 자의식을 중심으로 한, 두 세계관 사이의 갈등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중반에도 이르지 못한 현재에, 예술가는 예술 작품에 대한 자신의 지위에 대한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 이미 주어진 두 영역—AI님이 하시는 작업의 보조, 혹은 작품으로서는 생존할 수 없기에 사회의 그늘 속에서만 존재하게 되는   아마추어 예술가, 두 영역 중 하나만 선택 가능한 시점이 예견되고 있다. 이미 미국 헐리웃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태는, 이미 무너진 사회문화적 시스템 하에 무관심하게, 아니 오히려 하나의 팔리는 정보 상품으로서 소비되고 있다. 3.5%의 임금 인상, 인상된 재상영 분배금 따위가, AI가 현재 무작위로 도용하여 학습하고 있는 예술작품들에 담긴 예술가들의 노력을 무엇으로 담보할 것인가. 이전에 우리는 자본주의적인 문화상품의 사회의 가치관에 대한 악영향을 우려했지만, 이제 우리는 공장처럼 문화상품을 찍어내는 AI의 의식을 걱정할 것인가?


  여기에는 사회의 인간에 대한 지속가능성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다. 인간은 존엄한 존재가 아니어왔지만, 이제는 암묵적인 것이 아니라 존엄하지 않은 존재로서 공인되는 시대가 도래하는 세기에 살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적절성의 미와 가치’라는 지성없는 이성과, 인간의 동물적인 영역본능이—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겠지만—브레이크 없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이제 인간사회는, 적어도 한국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숭고를 통해 체험하는 것만으로는 치유될 수 없어보이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제 인간의 존엄성을 담보하는 거대서사 없는 아주 긴 시간을 지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삶에 내재하는 불확실성과, 그에 따른 인간 본연에 내재하는 불안으로 인해, 그 자신을 담보하는 거대한 서사 없이는 존속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젊은 세대에 만연한 무의식적 공포와 절망은, 생산력을 거의 상실했음에도 의료기술의 발전에 의해 존속하는 세대와, 사회적 시스템에 의존하기에 고착되어 있음에도 이를 개인적 능력으로 착각하는 세대와 함께 더욱 큰 사회적 혼란과 아노미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같은 혼란—심지어는 경제 및 세계 정세의 생존에 직결되는 불안정을 수반한—속에서 인간 개개인의 정신은, 그 자신을 지탱할 최소한의 가치체계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데이터로 논증될 수도 없는 것이어야 하며—논증될 수 있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조작가능한 대상이다(네이쳐지에 게시된 논문 중에서 조차 여러 편의 철회된 논문이 존재하며, 실적을 위해 공장식으로 조작, 양산되는 허위적 단체와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라도 한다면, 과학적이어서 믿을만하다는 20세기적 신화는 신화일 뿐임을 모를 수 없을 것이다)—거대한, 그래서 많은 자본을 소모하는 그런 집단에 결부된 것이어서도 안된다. 결국 개개인의 정신적 생존은, 그 자신을 위한 거대담론을 얼마나 충실하게—그래서 그 자신 조차 그에 의탁할 수 있을만큼—세우느냐에 달려있다고 본다.

  

  남은 21세기의 순수예술은, 이러한 소모적이고 자멸적인 사회와 문화 앞에서 각자 자신의 정신을 세우는 실천적 행위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AI에 비해) 하찮음밖에 남지 않은 대다수의 인간이 그 자신의 정신적 생존을 위해 띄우는, 암울한 바다 위의 조야한 부표와도 같은 것이다. 더이상 허황된 미도 없고, 희망을 약속하는 숭고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의 실제와 본질을 목도한 이라면, 이러한 현대사회를 야기한 인류의 정신이 온전한 현실인식 앞에 스스로를 인식한다는 아주 자그마한 부표라도 ‘아직’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음에 감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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