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의 미적 경험(the Aesthetic Experience of an Artwork)
- seungyonkimcomp1
- 2017년 8월 28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1월 22일
들어가기에 앞서, 모더니즘의 예술관/미학관에서의 예술작품과 미적 경험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시작한 글로, 현재 완전히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음을 밝혀둔다.
체험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부정성은 더이상 예술작품-감상자의 일방적인 차원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여러가지 형태로 변용되고 은폐된 것으로 본다.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예술의 부정성에 대하여서는, (의외로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모던의 철학자는 아니다—는 예술의 본질을 부정성에서 찾지 않은 것 같지만) 아도르노나 가다머 등이 예술에 있어서의 부정성을 핵심적인 것으로 파악한 것으로 생각된다.

미적 경험은 어떤 인지적 변화를 촉발하는 자극을 받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미적경험은 예술작품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닌 바, 예술작품 자체를 놓고 미적경험을 규정하는 것은 온전치 않다.
예술작품을 놓고 규정하자면, 인간이 어느 순간 예술작품을 만들고 나서 미적경험이 시작된 것이 되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예술작품을 만들었겠는가? 만약 우연이었다면 그 우연의 결과물에서 미적경험을 발견한 것은 우연의 결과로부터이지 예술작품으로부터가 아니다.
따라서 예술작품 이전에 미적경험이 우선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미적경험인가?
미적쾌감이라는 표현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지 못하며, 단지 그 무엇인가를 인간이 긍정적으로 느끼고, 또한 향유되고 추구되는 것이라는 것만을, 즉 미적 경험의 근원 외적인 것만을 밝히고 있으므로, 사실상 미적 경험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밝히는 바가 없다.
미적경험도 기본적으로는 인식과 인지의 과정을 포함한다. 그러나 무엇이 일상의 경험과 다른 것인가?
일상은 최대한으로 최적화된다. 즉 그것은 물리적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자원을 수급하고 그것을 소모하며, 그 과정이 최소화 될 수록 긍정적이다. 이것은 경제적 논리를 따른다.
학문과는 어떻게 다른가?
학문은 언어를 통해 간결하고 명징한 정의와 명확한 근거를 요구한다.
미적경험은 무엇인가로부터 새로운 인식을 체험하는 것이다.
여기서 '새롭다'는 것은 객관적 새로움이 아니라 주관적 새로움이다. 이것은 '이미 알고있음'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예술행위를 하는 이들—감상자를 포함하여—에게 새로운—그것이 심지어 반복이더라도—경험이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도 새로운 경험을 창출한다. 이것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행위가 곧 '새롭게하기'나 '재맥락화' 등이다.
그러나 적극적인 것만이 곧 긍정적인 것을 만드는 것은 아닌 바, 심지어 객관적으로 완전히 같고, 그 내적 맥락조차도 객관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음에도, 그것은 주관적으로 새로워질 수 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바흐 첼로 조곡에 대한 20년동안 매일같이 연습했음에도 연습할 때마다 새로운 것이 발견된다는 언급은 이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개개인의 발견은 타자에게는 발견이 아닐 수 있다. 예술에서 경험으로 발견되는 것이 물질적인 것, 객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의 경험은 감각—시각, 청각, 촉각, 때로는 심지어 후각과 미각까지도 포함하여—을 통하여 이루어지지만, 예술경험이 감각 자체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각이 지각을 통해 인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이 과정이 이미 개개인에게 형성되어 있는 경험과 기억과 무관해질 수 없으므로, 예술경험은 주관적이다. 그러나 그 매체가 되는 것은 어느정도(완전히는 아니지만) 객관적이다. 매체를 감각하는 것은 감각기관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경험과 기억은 개개인마다 천치만별이지만, 개개인이 가진 감각기관, 그 기능과 작동은 기본적으로 같기(유사하기) 때문이다.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이 기쁘다면 일상적 경험이다.
선물을 주고받는 것의 정의를 내린다면 철학적이다.
선물을 주고받는 것을 관찰한다면 사회과학적이다.
선물을 주고받는 것의 실효를 예측한다면 경제학적이고,
선물을 주고받는 것의 의의를 분석한다면 사회학적이다.
그러나 선물을 주고받는 것에서 보편적이지 않은 다른 의미를 발견하도록 유도한다면, 그것은 예술이다. 마치 그 '변기'와 같이.(그러나 그를 통한 발견은 필연적으로 일회적일 수 밖에 없으므로 사실 얄팍하다.)
요리가 어느 순간 예술이 되는가? 그것이 단순히 먹을 것을 만들고, 그 음식이 먹어짐으로써 만족을 주고 미각과 촉각에 즐거움을 준다면 그것은 일상의 영역이다. 요리의 과정과 그 결과물이 그 이상의 인식, 통념과는 다른 것의 주관적 인지를 이끌어 낸다면 그것은 예술이다.
이것은 다른 영역에서도 그러하며, 또한 전통적인 예술영역 내에서도 그러하다.
자본주의경제가 예술을 경제활동의 내부로 끌어들였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예술로 불린다. 어떻게 예술활동과 비예술활동을 구분하는가?
그것의 기준은 '무목적적이어야 한다'가 아니라, 목적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 외적이며 또한 주관적으로 새로운 인지를 가능하게 하는 경험을 촉발했는가 이다.
우리는 때로 예기치 않은 순간에 미적경험을 한다. 예술활동을 창작과 공연(혹은 전시), 감상으로 구분하면, 이 미적경험은 당연히 감상의 영역이며, 따라서 예술활동이다.
그러나 그 목적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 더 잘 작용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아무데—바닥이든 바위나 낮은 담벼락이든 나무의 가지 위든—나 앉을 수 있지만, 당연히 목적에 맞추어 만들어진 의자에 앉는 것이 가장 편안하다. 또한 쉬기 위해 만들어진 의자와 업무용으로 만들어진 의자는 생김과 기능이 다르며, 목적에 잘 맞게 기능하고, 그 목적을 가장 잘 보조한다. 그리고 의자제작자들은 그러기 위해 인체에 대해 연구하고, 재료를 연구하여, 의자가 목적에 맞는 형태와 기능을 갖도록 제작한다.
따라서 예술 외부의 영역에서도 미적경험은 가능하지만, 예술작품 자체가 미적경험을 촉발하는데 가장 최적화되어 있다 할 수 있으며, 창작 또한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현대의 예술작품은 가장 전통적인 소재에서부터 영역을 벗어나는 전위적인 소재에까지, 그리고 가장 단순한 형식에서부터 고도로 정교화되고 복잡화된 형식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일상적인 맥락에 파고드는 것에서부터 일상적 맥락을 비틀거나 벗어나는 것, 또는 일상에서는 절대 접할 일이 없는 그로테스크함이나 극도의 추상성 등을 통해 일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맥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와 범주, 구성와 맥락을 지니지만, 이 자체가 곧 미적경험의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종종 가장 단순한 형태가 보다 강도높고 깊이있는 경험을 선사한다. 그러므로 미적경험 자체에 대한 평가는, 그것이 가진 복잡성이나 혁신 등이 아니다. 예술은 과학도 기술도 금융과 자본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새로운지, 얼마나 매력적인지, 얼마나 큰 돈이 되는지 등은 예술의 척도가 될 수 없다. (그렇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된 전용이다.) 미적경험의 평가는, 주관적인 미적경험 그 자체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의 평가의 기준은, 그것이 얼마나 기술이 잘 발휘되었는가, 혹은 창작자의 의도가 얼마나 잘 드러났는가 등이 아니라, 인간의 인지과정에 대해 잘 이해하여, 주관적인 인지의 확장을 얼마나 잘 유도해 낼 수 있는가 가 된다.
여기서 '다른 인지' 또는 '새로운 인지'는, 이전과 완전히 다르거나 새로움을 의미하지 않는다. 역사는 주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전과 객관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주장으로서의 제작물의 근거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체험 속에서 가져다주는 것은 감상 이전의 '신선함'이지, 감상 중의 인지 확장의 체험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지식은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머리속에 '기록'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경험은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신기함, 흥미로움, 흥분 등의 느낌 자체를 목표로 잡기 때문이다.
예술로 불리고 있음에도 대중예술 또한 미적경험과는 종종 무관하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지, 인지를 경험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이미 하나의 생필품이다.
예술경험 속에서는, 반복마저 새롭다. 이 반복은 의미에 의미를 더한다(들뢰즈 차이와 반복 참조). 반복될수록 새로운 발견과 새로운 인식의 순간을 가져온다. 그 인식의 대상은 새롭지 않아도, 그 순간들은 새롭게 경험된다. 미적경험으로부터의 인지가 인식의 지평을 확대한다. 이것은 반복으로 쉽게 마모되지 않는다.
반복될수록 지겨워지는 것은 예술영역으로부터 밀려나 없어진다. 그렇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미적경험이 아니라 신선함에 기댄 것이며, 식료품은 생필품이지 예술이 아니다.
미술관의 변기같은 것은 한 번은 어떤 인식의 순간을 가져다 준다. 이것은 신선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지금에 와서 신선하기에는 너무 오래되었다), 그보다는 오래된 고정관념에 기대는 것이므로 오히려 처음의 순간부터 오래된 기념비같은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것을 처음 보는 순간, 그것은 그 사람이 이미 경험한 전통적 관념만큼 강렬하다. 따라서 변기는 예술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메세지를 던지므로, 그 메세지로 인해 인식은 단 한 번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변기의 깊이는 딱 그만큼만을 가진다.
이것은 이제 반복될 수록 지겨워진다. 그에 따라 변기는 예술영역으로부터 밀려난다. 오히려 이것에 의미를 더하는 것은 비평이다.
그러나 비평은 다른 예술활동과는 다르다. 이것은 차라리 학문의 영역으로서, 객관성을 요구하고, 같은 말의 반복은 불필요한 것일 뿐이며, 그것은 어떤 인식을 '전달'하고 '공표'하지, 미적경험을 촉발시키지 않는다.
창작은 예술활동이다. 창작자 자신이 창작을 통해 다른 인식을 펼쳐보기 때문이다.
공연은 예술활동이다. performer 자신이 미적경험, 다른 인식 속에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감상은 예술활동이다. 감상자는 예술작품으로부터 새로운 인식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평은 예술활동이 아니다. 이미 감상한 것에 대한 것을 분석하고 그것을 언어로 옮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술영역에 있어서는 말하자면 통역이며, 그 자체는 이론에 기반할 수 밖에 없으므로 학문이다.
따라서 비평이 예술의 새로운 영역이라는 것은 비평가의 오류이다.
*전체에서 '의미'와 관계된 부분들에 대한 서술은 최대한 자제하였는데, 그 의미의 발견이나 확대 등은 인간의 사고, '추상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안에서 자세히 서술하기에는 복잡하므로 대략적으로만 하고 다른 글로 넘긴다.
추상능력은 어떤 자극—외부던 내부던, 그러나 외부의 아무 자극 없이는 사고의 바탕이 될만한 것이 동물로서의 본능적인 영역을 제외하면 없게 되므로(심지어 그것을 생각이나 사고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외부의 자극을 필요로 한다—으로부터, 비직접적으로 다른 것, 예컨데 어떤 개념이나 무엇의 특성과 같이 추상적인 것에서부터 직접적인 대상, 현상, 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무엇과 무엇을 관계짓는 능력이며, 또한 하나의 대상으로부터 그 특성, 주요부분 등을 잡아내고 '보편'이라 불리는 개념에 따르는 어떤 관념으로—보편의 개념에 대해서는 들뢰즈 참조—대상을 대상화하는 능력이다. 구체적으로, 대상을 두드러지는 특성들을 중심으로 지각하여, 그것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사고를 위한 실재에 대한 인간의 감각은 이미 실재와의 완전한 동일성을 요구하지 않으며, 부분들의 관계와 결합, 종합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감각되어지는 것들의 관계와 결합, 종합이 곧 인간에게 현실로서 작용한다. 이 감각되어지는 것들은, 완전히 실재를 닮을 필요도 없다. 이 극단에서 나오는 것이 기호나 직관, 예감과 같은 것들이다.
기본적으로 언어는 이 능력의 기반 위에 세워진 것으로—기표-기의, 랑그-파롤, 언어의 가족유사성 등, 대상과 언어(단어)사이의 관계에서 언급되는 많은 것들이 이 능력과 관계된다—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사고의 많은 부분이 언어와 관계되어 있어 둘 사이의 틈을 가르기 쉽지 않으나, 언어가 실재와 기호 사이의 불일치의 문제를 안고 있는데 반해, 예술작품은 기호가 아닌 또 하나의 실재이므로—가상의 실재임에도, 가상현실이 마치 현실과 같이 인간에게 작용한다는 연구결과와, 뇌는 또한 실재하지 않음에도 그 자신이 실재라고 속는 환각조차 만들어내는 특성이 밝혀진 실험결과들로 보자면 가상의 현실과 실재의 현실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기호와 실재의 차이는 분명히 인지된다.—언어가 가지는 의미와 실재의 누수—와 더불어 은폐된 차이와 그로 인한 착각—와 같은 문제는 예술에서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예술에서 발생하는 다른 문제는 (가상의)실재임에도 실재와 다르다는 데서 나오는데, 이는 범주화의 오류로 보인다. 예술작품의 실재는 생필품으로서의 실재가 아니며, 경험적으로만 작용하는 실재이다.
예로, 데리다의 파이프. 욕망과 관계된 경험으로서는 문제가 없고, 욕구를 충족하려는 행위의 보조물로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이 존재하는 지점은 '실재'와 '기호' 사이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욕구적 차원의 실재와 욕망적 차원의 실재, 그리고 기호적 차원의 언어 세가지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이 차이를 전면에 드러내는 대신, 파이프의 깊이는 포기된다.
따라서 예술에 대한 태도는 요구되어질 수는 있겠지만, 예술화될 수는 없는 것이라 하겠다.
돌아가서, 예술활동은—창작이는 공연이든 감상이든—실재와 실재를 연결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이 추상능력을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고, 그러므로 예술활동은 삶, 그중에서도 특히 사고나 정신적영역의 체험적 확장이다.
미적경험의 의식의 확대, 의미적 체험은 곧 정식적 영역의 체험적 확장이며, 그것을 통해 확장된 부분이 곧 예술작품이 가진 '의미'다.
2017. 8. 28.
KR © 2017 김승연(Seungyon Kim). 출처 표기 인용 가능 /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N © 2017 Seungyon Kim. Quote with attribution. No reproduction or redistribution.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