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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UNGYON KIM composer
작곡가 김승연
예술의 두 측면: 제의와 알레고리
(제의에 관한 부분은 Mircia Eliade의 글을 참조. 보조적으로 Joseph Campbell) 단언할 수는 없으나, 예술의 기원은 '제의'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전제를 놓고 본다면, 예술의 본령 또한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의는 신화, 혹은 그 기록물인 경전을 기반으로 하여 구성된다. 가장 핵심적인 제의는 세계창조와 관련된 제의, 혹은 다른 희생제의가 되는데, 이는 세계 창조와 회복이라는 '역사'의 반복이다. 따라서 형식 상으로 '신'—혹은 천사거나 신령한 영이거나—이 창작자가 되며, 사제나 주술사와 일부 혹은 전체 참여자가performer가, 그리고 나머지 참여자는 일종의 '감상자'가 된다. 내용적으로, 이것은 비유, 보다 세부적으로 알레고리이다. 세계에 분포된 수많은 '남매 혼인'의 신화는 실제 남매인 두사람의 결혼 같은 것이 아니며, 태양과 달의 창조 혹은 탄생은 물리적인 태양계의 태양과 지구의 위성 달의 생성기원이 아니다
2018년 5월 22일
모든 예술작품은 알레고리로서 작용한다
모든 예술작품은 알레고리로서 작용한다. 감상자가 단순히 '잘' 배열된 소리나 색과 형태에서 무목적적인 태도에서 '균형'을 발견하는 것 따위를 통해 쾌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의 비유적인 형상-움직임과 시간/공간-형식으로부터 추상함을 통해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구체적-언어적 내용이 없는 음악에서 감상자가 의미를 발견하는 이유이며, 감성적이지 않은 작품 또한 예술이 되는 이유이다.
2018년 5월 18일
예술작품의 내용에 관하여 - Herbert Read의 '예술의 의미'에 부처
이전에 일독 후 메모해 두었던 글임을 밝혀둔다. 1) 고대나 중세사회에서 예술은 어떤 독립적 작업이 아니었다. 이것이 근세를 지나 현대로 넘어오면서 예술을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나 어떤 개념의 표현과 전달로 보는 관점으로 변화된 면이 있으나, 개인적으로 예술은 커뮤니케이션이나 전달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왜 예술은 왜 커뮤니케이션이나 전달이 아닌가? (1) 예술가가 예술작품을 통하여 어떠한 개념 내지는 관념을 전달하려 할 때, 그것이 과연 원래 의도된 의미대로 전달되는가? 이는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언어에 있어서도 흔하게 언급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도 아닌, 예술작품을 통해 개념/관념이 정확히 전달될 수 있겠는가? (2)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점에 집중한다면, 그 중간에 놓인 예술작품과 그와 관련된 과정인 창작과 감상을 없애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전달이 될 것이다. 사고의 기반은 일반적으로 언어이므로, 언어를 통해 전달하는
2018년 5월 11일


음악의 내용이라는 것에 관하여
음악은 소리와 시간의 예술이다. 그러나 매끄럽게 배열된 아름다운 음색 등은 음악의 한 측면일 뿐 음악이라는 예술분야의 핵심내용은 아니다.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들으면서 인지하고 향유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이해하지도 못하는 라틴어 가사로 된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들으며 받는 위안은 어디서 오는가? 소리는 소리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으나, 감상자는 그로부터 단순한 형태와 배열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한다. 일례로, ‘어둠에서 광명으로’라는 베토벤 운명교향곡을 나타내는 이 유명한 어구는 우리가 음악을 통해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 곡은 C minor로 시작하여 중간악장들을 거쳐 C major로 끝나는데, 이러한 구조가 두 단어로 집약되어 있다. 그러나 단조로 시작하여 장조 내지는 장3화음으로 끝나는 곡은 바로크음악까지 포함하여 수도 없이 많음에도, 그 모든 곡들을 들을 때 저 어구와 같이 느끼지는 않는다. 이
2018년 5월 11일


예술의 범주와 내용에 관하여 2
현재 예술로서 언급되는 분야들의 순수예술작품은 무엇으로써 예술임을 인정받는가? 현대의 예술은 예술이라는 범주 내부에서 출발하여 외연을 넓혀왔다. 따라서 그것이 가장 정신활동으로서의 의미가 가장 퇴색된 지점—단지 새로운 개념을 예술작품으로써 소개하는 것이나, 프로파간다로서 감상자에게 주장을 주입하는 것 이상의 어떠한 정신활동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지점들—에서도 그것들은 예술작품으로 불렸으며, 그것이—예를 들어 변기*가—미술작품인가 아닌가는 논의는 있어왔어도, 이미 예술인 분야에서, 이미 예술작품으로 언급되는 것들이 정신활동의 충분한 차원을 갖고 있는가는 그다지 논의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모더니즘이 그 자신의 문제를 떠넘긴 것이 타당한가 아닌가를 떠나서 예술에서 이것은 중요한 지점이며, 모던과 포스트모던, 순수예술과 대중예술, 자본주의 사이에서 급격한 외연의 확장으로 인해 예술의 내용이라는 지점이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이므로, 포스트모던의 입장에서도
2018년 5월 11일


예술의 범주와 내용에 관하여 1
음식은 일반적으로 예술이 아니다. 그러나 미식은 예술인가? 혹은 패션은 예술인가? 인간의 기본적인 의식주와 관련된 것 중 유일하게 건축만이 오래전부터 예술의 영역에 들어서있으나, 그럼에도 아파트나 빌라를 놓고 예술작품으로서의 건축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즉, 생존에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는 것만이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미식이나 하이패션은 예술의 범주에 들어올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갖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예술에는 미-추의 스펙트럼을 포함한다. 추한 것도 그것의 의미에 따라 예술작품으로서 구현된다. 최근의 미식에서의 맛이나 패션에서의 형태는 아름다움만을 포함하지는 않고 있다. 새롭거나 기묘하고 이상한 맛, 괴상하고 때로 이해할 수 없는 형태들이 미식과 패션 안으로 들어와 있다. 요리와 패션이 예술인가를 생각해보기 위한 한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요리에서의 추, 예를 들어 구역질나는 맛의 음식이 있다고 하자. 이것은
2018년 5월 11일


현대예술-현대음악의 상징, 형식과 내용
현대에 예술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은, 공통관습적인 어떤 문화의 상징체계를 벗어나 하나의 새로운 도상적으로 작용하는 체계를 세우는 것이다. 도상학이라는 것은 그림의 상징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것으로, 이러한 코딩-디코딩적 과정이나 지식은 비단 미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음악에서도 반음계적로 하행하는 선율은 라멘토 멜로디로서 비통함을 표현하는 것이라거나 하는 일종의 상징들이 존재해왔다. 이는 보다 개인적 표현이 두드러지는 낭만주의에 와서 바그너의 트리스탄 화음 등과 같이 전통적 어휘와 결부됨에도 개별적으로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는 개인적인 전용을 통해 점차 전통적 사용으로부터 멀어지며, 전통에 대한 반기와 새로움을 기치로 내건 모더니즘에 의해 급격하게 해체되고, 새로운 상징에 의한 새로운 해석법이 등장하게 된다. 미술에서는 열차 등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새롭게 나타난 문명의 이기를 통해 빠르고 선명한 움직임 자체가 미래적 비전을 보여주는 새로운 상징
2018년 5월 11일


모더니즘의 의미적 차원의 깊이
모더니즘에서 예술작품이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작품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어떤 현상, 혹은 물질의 감각적 측면을 분리하여 그 자체를 하나의 독립적 차원으로 만들고, 다른 의미들을 제거한 채 거기에 새로 부여한 단 하나의 의미,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의 층위만을 남기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으로는, 모더니즘 초기의 미래주의 운동이 있다. 미래주의에서 운동, 움직임이라는 것은, 그것이 이해되는 의미—'발레'라거나 '기차의 운행'이라던가—가 제거되고, '운동'이라는 하나의 현상으로서 남겨진 후, 여기에 '미래지향적'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그리고 주관적인 의미층위만을 부여한다. 여기서 '운동' 자체는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새로운 계약, 유토피아적 비전 구현의 약속을 보여주는 하나의 성물이 된다. 이전의 회화에서는, '동작'(혹은 자세. 움직임과는 다름)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공통적인
2018년 5월 6일


'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2
포스트모던 시대의 삶은 두가지로 귀결된다. 극도의 안정성과 극도의 향유. 이전의 최고의 직업은 '사'자 돌림으로 여겨졌으나, 지금의 최고의 직업은 '공무원'이다. 모순적으로, 모던은 포스트모던이 무지향적인 특성을 비난함에도 포스트모던은 자신의 존재안정성을 위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준비하고, 모던은 자신의 이념이 자신의 생존을 이끌리라 생각하므로 모든 것을 버리고 투신하거나, 모든 것을 투사한다. 즉, 모던은 현실지향적이지 않기에 언제나 준비되어 있지 않고, 포스트모던은 불안한 자기를 의식하기에 많은 것을 준비한다. 단지 상황은 대비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대비가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지향성은, 이념적이지 않으므로 모던적이지 않음에도 어느정도 그러한 특성을 띤다. 대비의 전략이 합리성의 탈을 쓰는 것이다. 이는 다시 타자와의 동질화, 획일화를 유발하며 생존을 위협한다. 그러면 여기에 차이를 만들기 위해, 또다시 보다 많은 시간
2018년 5월 1일


'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1
'나'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부정성 위에 세워져 있으므로 공허하다. 나의 범주는 타자의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므로, 타자는 내가 아니지만, 타자 없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 나의 경계가 불명확 혹은 그다지 강조할 필요가 없었던 시점, 물리적 존속이 자아감보다 중요했던 시기에서 나의 비어있음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속한 전체의 생존은 곧 나의 생존이므로, 자타의 구분은 오히려 물리적 존속을 위협한다. 반대로, 현대의 '나'들의 물리적 존속은 내가 속한 우리의 존속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나의 물리적 존속과 생존가능성은, 타자와의 차이에 기반한다. 특징 없이 타자와 동일한 나, '타자와 동일한 능력을 가진 나'는, 필연적으로 타자와 동질성을 이유로 경쟁하게 된다. 따라서 이질성이 생존의 위협이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오히려 동질성이 생존을 위협한다. 이는 큰 문제, 딜레마를 가져오는데, 나의 기반이 되는 타
2018년 5월 1일


음악에서의 시간
음악은 시간예술이며, 이에는 비단 작곡이라는 작품의 생산활동에서 발생하는 기술적인 시간통제에 국한되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작품과 공유하는 것으로만 작품의 감상이 이루어질 수 있음 또한 내포한다. 그러나 20/21C의 음악에서 과연 그러한 측면에 대한 고찰이 작품 안에 녹아있는가? 예술의 다른 영역인 미술(특히 회화)에 있어서, 어떤 질료가 위치하는 차원으로서의 의미로 음악에서의 시간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공간은, 20C 중반 추상예술에 대한 논의와 함께 깊게 다루어졌으며, 회화의 평면성에 대하여는 추상회화의 핵심적 개념으로까지 취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20C 중반에 시간성, 혹은 시간의 어떤 특성이 음악에 있어 핵심적인 것으로서 논의되었다거나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20C의 주류에 해당하던 음악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탈시간적 특성이 두드러졌다고 생각한다. 예로 많은 작곡가들에 의해 씌여졌고 영향을 미쳤으며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2017년 12월 12일


예술작품의 미적 경험(the Aesthetic Experience of an Artwork)
들어가기에 앞서, 모더니즘의 예술관/미학관에서의 예술작품과 미적 경험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시작한 글로, 현재 완전히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음을 밝혀둔다. 체험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부정성은 더이상 예술작품-감상자의 일방적인 차원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여러가지 형태로 변용되고 은폐된 것으로 본다.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예술의 부정성에 대하여서는, (의외로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모던의 철학자는 아니다—는 예술의 본질을 부정성에서 찾지 않은 것 같지만) 아도르노나 가다머 등이 예술에 있어서의 부정성을 핵심적인 것으로 파악한 것으로 생각된다. 미적 경험은 어떤 인지적 변화를 촉발하는 자극을 받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미적경험은 예술작품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닌 바, 예술작품 자체를 놓고 미적경험을 규정하는 것은 온전치 않다. 예술작품을 놓고 규정하자면, 인간이 어느 순간 예술작품을 만들고 나서 미적경험이 시작
2017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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