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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2

  • seungyonkimcomp1
  • 2018년 5월 1일
  • 1분 분량

포스트모던 시대의 삶은 두가지로 귀결된다. 극도의 안정성과 극도의 향유. 이전의 최고의 직업은 '사'자 돌림으로 여겨졌으나, 지금의 최고의 직업은 '공무원'이다.


모순적으로, 모던은 포스트모던이 무지향적인 특성을 비난함에도 포스트모던은 자신의 존재안정성을 위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준비하고, 모던은 자신의 이념이 자신의 생존을 이끌리라 생각하므로 모든 것을 버리고 투신하거나, 모든 것을 투사한다. 즉, 모던은 현실지향적이지 않기에 언제나 준비되어 있지 않고, 포스트모던은 불안한 자기를 의식하기에 많은 것을 준비한다. 단지 상황은 대비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대비가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지향성은, 이념적이지 않으므로 모던적이지 않음에도 어느정도 그러한 특성을 띤다. 대비의 전략이 합리성의 탈을 쓰는 것이다. 이는 다시 타자와의 동질화, 획일화를 유발하며 생존을 위협한다. 그러면 여기에 차이를 만들기 위해, 또다시 보다 많은 시간, 보다 많은 노력, 보다 많은 준비가 필요해지고, 그럼에도 그것이 생존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현대사회에서는 애초에 다양성을 인식하지 않고는 생존을 유지하는 것이 벅찬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으며, 다양성 아래에서 모더니즘적 전략은 생존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포기되어야 한다. 모던의 성공은 과거와 타자에 대해 착취적이고 자기기만적임에도, 거인 위에 올라서 우쭐거리는 난쟁이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더니즘 시기의 많은 성과들이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모던 이후의 성과들은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것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다시 규격화되었는가? 모던의 전략은 논리게임을 시작하나, 그 자신이 주장하는 이성이나 합리성보다는 상대를 거꾸러뜨리고 밟고 올라섬으로써 자신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흔히 나아간다. 논리는 형식이지 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모던니즘적 정신의 폐혜에 물들게 되면, 타자에 논리적이거나 비논리적인 우위를 점함으로써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타자를 감화시키려고 하고, 나와 나의 이념의 연장인 집단의 구성원들을 같은 전략을 취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그들은 비공식적인 준극장국가의 왕과 같다. 자신의 자기개념의 연장으로서의 타자들이, 자신이 제안한 전략, 즉 일종의 이념을 통하여 외부에서 성공을 거두어 들임으로써, 타자로부터 자아감을 착취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물리적 자원들을 가지고 있을 때만 성공적인 생존전략이다. 사회에서 어떤 선택이 성공할 것인지 아닌지는, 이성과 합리성만 가지고는 보장될 수 없으며, 가진 자원을 동원하여 성공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사실 성공적이아고 부르는 것도차 어폐가 있는데, 이미 자원을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 이러한 전략 없이도 생존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적 생존방식—삶의 방식에서는 이러한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다. 모더니스트에게 '나'는 관념의 물화이며, 따라서 나-개념/관념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실용적인지가 중요하고, 얼마나 사회적으로 성공적인가, 사회를 얼마나 더 잘 돌아가게 만들었나가 '나'의 확실성을, 내가 타자보다 얼마나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인지를 보장해주는 척도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이는 타자에 대해 보다 더 '비전적'인 것으로 드러나며, 타자가 따라야 할 존재, 일종의 우상이 된다. 반면 포스트모더니스트에게 자기합리화는 무의미한 기제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에게 있어서의 실존은 자신의 합리성을 통해 확인받지 않으며, 따라서 타자보다 우위에 있어야만 하는 필연적 이유가 없다. 모더니스트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공격성과 부정성을 보일 때, 포스트모더니스트는 긍정성으로 세상을 채울 수 있다.


그럼에도 포스트모던적 전략을 통해서 항상 안정적이고 만족스러운 내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현재에 집중하며, 그 현재가 곧 나, 혹은 타자와 구분되는 나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적 태도에 있어서, 향유하는 모든 것은 곧 '나'를 현재에 존재시키는데 집중한다. 현재에 집중하면, 타자와 '나'의 경계는 무너질 수가 없다. 나의 몸은 타자와 공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향유하는 대상들은 공유된다. 보는 대상은 공유될 수 있다. 만지는 대상도 공유될 수 있으며, 읽히는 정보도 공유될 수 있다. 즉, 접촉은 공유기능하다. 그러나 그 접촉을 이루는 몸은 공유 불가능하다. 따라서 향유하는 대상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나의 반영물로서 나를 여기에 현존시킨다. 이것들은 곧 경험과 기억을 통해 내가 된다. 그러나 경험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경험 자체가 나를 만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이미 유명해진 저 물음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기억은  나인가?


그러나 이 표현도 정확하지는 않다. 기억은 곧 과거의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체험은 곧 나인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실제적일 필요가 있다. 모더니즘은 합리성과 이상적인 실용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고려될 필요가 없다. 내가 사라지고 실용성만 남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필요가 충족되는데 빵이던 고기던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체험하는 나와 기억되는 내가 정말로 나인지, 그것이 정확히 어떻게 '내'가 될 수 있는 지를 추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실제로 나인가?', '그것이 나에게 곧 나라는 확신을 주는가?, 이것만이 지금 중요한 질문이다.


질문은 단순하다. 그리고 답도 간단하다. 우리는 그 체험동안, 무언가를 발견하고, 경험하며, 좋아하며 싫어하는 나를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그 체험이 지속되는 동안, 더 짧게는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기대가 꺼지고 주의가 흩어지는 그 시점까지만 나를 체험한다. 무언가를 신기해하고, 흥미로워하고, 즐거워하며, 여러가지를 느끼고 생각하는 나의 체험 속의 지속은 나를 발견하는 것이지만, 지루해하는 나, 괴로워하는 나의 지속은, 그저 동일한 복제들일 뿐이다. 그 지루하고 괴로운 최초의 순간에 나는 그것을 싫어하는 나를 발견하지만, 나머지 부분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다.


체험의 이후에도 상황은 비슷하다. 좋은 체험이던 나쁜 체험이던, 그것은 시간 속에서 잊혀진다. 잊혀진 나는 나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시간과 기억 속에 깜박이는 '나'들 사이에서, 무엇이 '나'를 만드는가?지금 그것을 명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를 느끼는 것, 자아감을 유지하는 것에 있어서 중요한 것으로부터 더듬어 볼 수는 있다.


'자기'의 유지에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연속성이다. 생존이라는 것은 곧 물리적인 '나'의 연속을 의미한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내일도 '나'라는 존재가, 나라는 육체가 존재할 것이라는 의미다. 아직 신뢰할만한 보고는 없는 것 같으나, 우리는 살아돌아온다는 것에 대하여—좀 더 명확히는 육체가 썩어 없어진 상황에서 돌아온 인물 혹은 썩고있는 육체로서 연속성이 깨어진 것으로 보이는 인물이 살아 돌아오는데 데하여 공포를 가지고 있다. 연속성의 깨어짐으로 인해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는 살아돌아온 인물들에 대한 언급이나 기록이 있기도 하고, 살아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종교도 있는데 이와 같이 영혼으로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돌아오는 경우에서도 육체의 연속성이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 같은 경우 몸의 보존이 중요한 문제로 취급되고, 크리스트교의 전해지는 이야기에서는 살아 돌아온 성인의 아주 오랫동안 묻혀있던 육체가 '여전히 썩지 않았다'는 언급이 있다.


사실, 정말로 동물적인 차원에서는 '나'를 유지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먹고 자고 하는 나의 몸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없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적 차원에서 몸이 곧 '나'는 아니므로 문제가 된다. 몸의 생존이 곧 정신적으로 나의 존재를 보장해주지 않으며, 또한 내가 나의 정신을 볼 수 없으므로, 그것은 언제나 반영적으로만 인지된다. 그렇기에 외부의 타자와 감각을 통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경험들이 '정신적 존재로서의 나'를 인지하는데 필수적일 수 밖에 없다.


반영적인 과정을 통한 자기인식으로 인해, 실제 나의 정신적인 모습과 인지하는 나의 모습 혹은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어느정도 괴리가 생길 가능성이 존재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특히, 정신적인 나의 생존 자체와 나의 정신적 모습이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실제와 이상은 어느정도 유사할 수도 있으나, '내'가 학습되어진 이상적인 나의 모습과 완벽히 일치할 수는 없다. 그것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는데, '이상적인 나의 모습'이라는 것은 모던한 관념으로, 타자에 대해 공격적이기에 이상적인 나 개념이 나의 의식을 유혹하여 '실제의 나'를 공격이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상적인 나'는 허상으로서만 지속적이다. 나는 살아있는 존재기에 끊임없이 변화하며, 한 순간 내가 이상적인 모습에 맞춘다 할지라도, 모든 순간에 이상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상적인 모습을 취하는 대신에, 자기 자신을 인지하는 수 밖에 없으며, 다만 존재의 연속성은 삶이라는 연속적 과정에 의해 유지되므로 그 과정 중에 변화를 만드는, 즉 나를 만드는 선택들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자유로운 선택이 전혀 아니다. 나도 모르는 미지의 나를 발견하고, '나'는 그와 관련해서만 '나'인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즐기는 나를 발견하고 그림을 그리고 공부하여 화가가 될 수도 있지만, 예술을 하고 싶음에도 삶의 안정성 때문에 미술이 아닌 공무원이 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 때의 '나는 미술을 포기하고 공무원이 된 나'이다. 나는 '공무원'은 될 수가 없다. 내 안에 '공무원이 되고 싶던 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인타깝게도, '나'의 이상을 만족시켜주는 '잘하는 나'는 그다지 실제이기 어렵다. 그것은 그것이 발견되는 진실이 아니라 언제나 질에 대해 타자와 관계적인 혹은 양적인 판단을 거치는 모던한 전략이며, 동시에 비교대상에 종속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온전히 타자성만이 남는다.


다만 문제는, 이유가 무엇이던 간에 '내가 싫어하는 나'는 '나'의 지속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지속성은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을 이르므로, 싫어하는 부분은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나'의 온전한 연속성, 안정적인 '나'를 위해서는, 스스로 느끼고 인지하는 자기를 다듬을 필요가 있다.

내가 좋아나는 나는 어떤 때 발견하는 어떤 모습이며, 내가 싫어하는 나는 어떤 때에 발견하는 어떤 모습인가?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흥미를 가지며, 무엇을 싫어하는가? 또한 나는 무엇을 견딜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과 그에 따른 행동이, 자기감의 안정성에, 그리고 자기에 대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좁히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KR © 2018 김승연(Seungyon Kim). 출처 표기 인용 가능 /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N © 2018 Seungyon Kim. Quote with attribution. No reproduction or redistrib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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