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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내용이라는 것에 관하여

  • seungyonkimcomp1
  • 2018년 5월 11일
  • 5분 분량

음악은 소리와 시간의 예술이다.


그러나 매끄럽게 배열된 아름다운 음색 등은 음악의 한 측면일 뿐 음악이라는 예술분야의 핵심내용은 아니다.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들으면서 인지하고 향유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이해하지도 못하는 라틴어 가사로 된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들으며 받는 위안은 어디서 오는가?


소리는 소리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으나, 감상자는 그로부터 단순한 형태와 배열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한다. 일례로, ‘어둠에서 광명으로’라는 베토벤 운명교향곡을 나타내는 이 유명한 어구는 우리가 음악을 통해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 곡은 C minor로 시작하여 중간악장들을 거쳐 C major로 끝나는데, 이러한 구조가 두 단어로 집약되어 있다. 그러나 단조로 시작하여 장조 내지는 장3화음으로 끝나는 곡은 바로크음악까지 포함하여 수도 없이 많음에도, 그 모든 곡들을 들을 때 저 어구와 같이 느끼지는 않는다. 이는 우리가 발견하고 느끼는 음악의 내용이 단순히 소리와 화음의 ‘밝고 어두운’ 측면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인간이 이 무의미의 대상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발견해 내는 능력이 바로 추상능력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의미한 것들의 배열과 그로 인한 맥락을 통해 이루어진다. 음악에서는 소리들의 시간 속에의 배열이 추상능력을 통한 의미를 발견해 낼 수 있는 맥락을 만들어낸다.


여기에는 문화적 배경 등과 같은 외부적인, 학습된 요인들이 작용하므로, 온전히 인류 공통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럼에도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으 통하여 이루어지므로 주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베토벤의 다섯번째 교향곡과 반대의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 차이코프스키의 6번 교향곡, ‘비창’이다. 어두움에서 출발하여 어두움과 밝음의 교대로 인한 긴장, 그리고 마침내 밝음으로 나아가는 베토벤의 것과는 달리, 차이코프스키의 그것은 마찬가지로 어두움에서 출발하여 어두움과 밝음의 교대로 인한 긴장을 불러오나, 중간악장들에서는 완전히 밝고 힘찬 행진으로 전개된 후 마지막에 예기치 않은 비통한 악장이 나타남으로써 끝난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는 ‘운명에의 승리’로, 그리고 하나는 ‘비창’으로 이해되는 맥락을 형성한다. 이것은 클래식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어느정도 이해되는, 즉 개개인의 문화적 배경을 어느정도 넘어서는 추상능력의 작용을 볼 수 있는 예이다.


좀 더 덜 보편적인 문화적 배경의 예도 있다. 펜데레츠키의 그 유명한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가 그것인데, 그 제목이 작곡가 본인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 전혀 아님에도—이 곡, 내지 그의 이러한 스타일의 작품들은 원래 음향적 실험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이 곡을 듣는 사람은 쉽게 어떤 고통스러울 정도의 불편함으로부터 혼란과 절규, 생을 향한 몸부림 등을 연관지을 수 있다. 물론 일반인들에게 제목 없이 곡을 들려준다면 음악이 아닌 소음과 같은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도 농후하나, 제목이라는 것은 작품의 일부로서 작품감상의 디렉션을 제시하는 것이므로, 제목을 통해 그 맥락을 어디서 발견해야 하는가를 파악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다. 돌아가서, 많은 사람들이 감상에서 그러한 맥락을(단지 호불호나 평가가 아니라) 발견해 낼 수 있다면, 그것을 작곡가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그 곡의 내적인 맥락은 그러한 감상을 발견해 내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토대에서 음악의 내용을 ‘소리의 배열에 의한 맥락에서 인간이 추상능력을 통해 발견해내는 무엇’이라고 정의할 때, 많은 현대음악들은 사실 별 내용이 없다. 특히 20C에 많은 현대작곡가들은 많은 새로운 발견들과 이론들을 적용하며 많은 곡들을 썼으나, 그것은 청취로부터 인지되지 않는다. 또한 다른 경우로, 그들은 많은 소리들을 섬세하게 다루며 그 자체를 내용으로 삼으나, 그것은 많은 경우 단지 이론일 뿐이며, 전문가의 자기만족일 뿐이다. 사실 미세한 소리의 변화가 대체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전문가와 일반인의 인식 차이를 볼 수 있는 설문을 하나 소개한다.


(문제가 되면 삭제합니다.)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것은 ‘빅뱅이론’에 관한 것인데, 빅뱅은 기본적으로 관측할 수 없어 가설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으므로, 다른 과학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인에게는 이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지점은, 얼마나 정확성이 있는가 내지는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데서 나타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일반적인 사람들이 양자세계가 어떠한지, 쿼크와 렙톤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을 넘어서, 과연 과학의 어떤 분야-내용이 인간의 삶에 중요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쉽게 넘어설 수 없다는 점에서 전문가의 시각이 옳다고만은 할 수 없다.


많은 편리한 현대문명의 이기들이 그와 관련이 있다한들, 편리한 삶은—그것이 선호됨에도 불구하고—가치있는 삶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며, 편리한 삶은 대안적으로 선택되기는 할 지언정 가치를 추구하는 삶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10대들이 그들의 스타를 선망하며 그렇게 되기를 갈구할 때, 그것이 안락한 삶이기에 원하는가, 아니면 그들이 그것이 어떤 가치있는 삶의 형태라고 생각하기에 선망하는가? 이 삶이 인류보편적으로 가치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그들이 이룰 추구할 때 그들 나름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이나 수학 등의 영역이 일반인에게 삶과는 별개의 영역으로 치부되는 것은, 그것이 단지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치있는 삶과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단 한번도 왜 일상생활에 쓸 일도 없는 어려운 과학과 수학을 학창시절에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해, 그것이 단지 필요하니까, 수능에 나와서, 두뇌 트레이닝이 되서 등의 변두리적인 답변 외에 그 자체의 가치를 언급하는 답변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제는 학창시절에라는 것과는 백만광년쯤 떨어진 나이가 되었지만, 이후에 자녀를 갖게 되어 자녀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무엇이라 대답해야 하겠는가? 공부해서 좋은 점수 받고 좋은 대학가면 인생이 달라진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저런 답변은 자녀가 학업에 열중하게 되는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답변이다. 필자는 좋은 시험점수로 학원에서 상품권 받아 게임잡지 사보려고 공부했고, 이 원동력으로 전교등수를 따지는 점수대를 처음 만들었다. 이건 좀 극적인 예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어떤 것이 가치있음은 그것이 인간의 삶, 단지 물질적인 것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가치있는 무언가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가치있게 여겨지는 것이다. 다시말해, 단순히 이해되는가가 그것의 중요성을 이해시켜주는 것이 아니다. 전문화가 당연시되는 현대에 있어서 타 영역에 대한 낮은 이해도는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어떤 영역의 중요한 내용, 중요한 이론 등이 그 영역에 종사하지 않는 이에게 온전히 중요성이 인지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지식, 어떤 발견 등이 그 영역에서 중요한 것으로 취급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곧 인류에게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 아니며, 이는 그 영역에 대해 단지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그 영역에 종사하기 때문에 중요성을 과도하게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현대음악, 20C의 아방가르드, 컨템포러리, 뉴뮤직의 실패는 여기에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대체 모든 것을 줄세운 세리얼리즘(음렬주의), 토탈세리얼리즘 같은 것을 하면서, 어떻게 이것을 미래의 음악이라 단언했단 말인가? 사람들이 모든 것이 통제되는 사회, 빅브라더를 질색하는데 왜 음악은 그런 것을 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아방가르드’한, 첨단을 달리는 것이라고 여겼단 말인가? 인간과 사회에 있어서 ‘모든 것의 통제’라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며 어떤 식으로 기능할 것이고, 어떠한 긍정적-부정적 기능이 있는지를 사회학자가 연구할 연구분야이지, 예술가가 섣부르게 확신에 차 단언할 영역이 아니며, 그들에게 그러한 능력도 없다. 이것은 예술가가, 내지는 예술작품이 어떠한 비전을 제시하는 행위 자체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개인적인 견해가 있고 개인적인 비전이 있을 터이다. 그러나 그 확신에 찬 작품이 과연 환영에 미혹된 태도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것이 정말로 가치있는 것인지, 인간에게, 그리고 인간의 삶에 중요한 가치인지, 숙고의 과정을 거친 내용인가? 바로 이 지점이 모던의 경박함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여기에는 단지 새로움에 대한 찬미 외에, 인간의 삶의 어떠한 가치가 결부되어 있는지에 대한 시각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새롭고도 앞선’ 현대음악이 외면되는 이유의 실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대중음악 내지는 소위 ‘청중에 다가서는’ 음악이 내용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글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그것은 ‘생존을 위한’ 음악이다. 현대사회는 사회적/외부적 압력이, 그리고 그로인한 스트레스다 넘쳐나고, 개개인은 정신적인 생존을 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너는 무언가 잘못했다, 잘못되었고 잘못하고있다’를 주입하는 사회, 개개인에게 계속적으로 부정성을 주입하는 사회에서, 개개인은 사회와는 별개로 자신의 정서적 안정을 위한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대중예술을 이를 위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것은 연명이다. 대중예술의 향유는 오늘을 살 수 있게 하는 힘을 줄지언정,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하게 해주지 않는다. 대중예술은 ‘회사’라는 거대 자본주의 생명체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물리적 존속을 위해 만들어졌으므로, 그것은 그정도까지의 기능만을 가진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의 삶에 중요한가? 무엇이 과거에도 존재했고,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래에도(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으나) 존재할 인간, 그리고 인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인가?


동양의 철학에서(유교를 제외하고, 그리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종교에서) 대체적으로 현실의 물질적, 물리적인 것들은 허상적이거나, 그 자체로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쳐지나가서, 언젠가는 잊히고 사라질 것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지 않고, 단지 과정으로서만 중요하다. 일련의 과정들, 생각과 반응들, 행위들은 현재의 나를 만든다. 그것은 그렇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 과정이 삶이다. 실제의 삶, 실존에서 느끼는 것들, 이것들이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성공과 실패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어려움, 인간관계에서의 고독이나 함께함에서 오는 심리적 안정, 관계를 시작하고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의 느낌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실체이다.


2018. 5. 11.


KR © 2018 김승연(Seungyon Kim). 출처 표기 인용 가능 /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N © 2018 Seungyon Kim. Quote with attribution. No reproduction or redistrib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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