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예술-현대음악의 상징, 형식과 내용
- seungyonkimcomp1
- 2018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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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예술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은, 공통관습적인 어떤 문화의 상징체계를 벗어나 하나의 새로운 도상적으로 작용하는 체계를 세우는 것이다.
도상학이라는 것은 그림의 상징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것으로, 이러한 코딩-디코딩적 과정이나 지식은 비단 미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음악에서도 반음계적로 하행하는 선율은 라멘토 멜로디로서 비통함을 표현하는 것이라거나 하는 일종의 상징들이 존재해왔다.
이는 보다 개인적 표현이 두드러지는 낭만주의에 와서 바그너의 트리스탄 화음 등과 같이 전통적 어휘와 결부됨에도 개별적으로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는 개인적인 전용을 통해 점차 전통적 사용으로부터 멀어지며, 전통에 대한 반기와 새로움을 기치로 내건 모더니즘에 의해 급격하게 해체되고, 새로운 상징에 의한 새로운 해석법이 등장하게 된다.
미술에서는 열차 등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새롭게 나타난 문명의 이기를 통해 빠르고 선명한 움직임 자체가 미래적 비전을 보여주는 새로운 상징으로 들아왔다. 음악에서는 이것이 전자음악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 중 전자음악에 손을 대지 않은 경우가 드물 정도였다.
불협화의 해방까지 선포한 근대음악에 이르러서, 작곡가는 전통적 맥락에 의한 음악적 맥락 대신 새로운 맥락을 형성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많은 작곡가들은 새로운 맥락을 감각을 통해 이해시키는 대신 언어적 설득을 시도함으로써 많은 경우 실패하게 된다.
음악에서의 예는 음렬주의와 전음렬주의가 있다. 음렬주의는 본래 '12음의 평등성'에 의거하여 고안된 기법으로, 수많은 작곡가들에 의해 조성의 대안으로 사용되었다.(그리고 지금은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잊혀졌다.) 그러나 음을 한번씩 돌아가면서 씀으로써, 음의 위계 시스템을 해체하고 평등을 가져온다는 것은 언어적으로는 그럴듯하게 들릴지언정 실제 곡에서는 음의 길이나 강세 등의 문제로 전혀 음 사이의 평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인간의 인지패턴과는 일치되는 바가 없어 이해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며, 돌아가면서 한 번 씩 나타났기에 평등이 성취된다는 것은 유아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그에 따라 현재는 12음 기법 자체보다는 '불협화의 해방'이라는 보다 자유로운 불협화음의 사용을 중심으로 후기낭만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는 관점이 보다 늘어났다.)
음렬주의와 명칭상으로 비슷하나 또 다른 형성과정을 가지고 있는 전음렬주의는, 모든 것이 이성적으로 질서정연함을 내세웠으나, 이 역시 음악 고유의 매체에 대한 몰이해와 인간의 기본적 특성인 감각-지각의 작동방식을 무시하고 음악 외적인 이론만을 사용한 결과로 청중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외에도 만델브로 프랙탈, 확률이론이나 브라운 이론 등과 같은 과학-수학적 발견과 정리들로부터 이론을 끌고 들어온 경우들이 있으나, 이들 또한 마찬가지의 상황을 맞았다.
이와 달리 종교적 상징을 새롭게 접근/해석하는, 모더니즘의 주류적 움직임과는 완전히 다른 개인적 노선을 걷는 경우들이 있었는데,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과 지아친토 셸시(Giacinto Scelsi), 소피아 구바이둘리나(Sofia Gubaidulina) 등이 대표적이다.(개인적으로 구바이둘리나의 경우는, 작곡의 기법과 작품의 주제가 일치하지 않거나, 악보상으로만 확인되고 청각적으로는 인지되기 힘든 상징을 사용하는 경우도 꽤 많아, 작품의 집약성 내지 주제의 선명성이 조금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메시앙은 많은 새소리들을 채집하고, 자신의 곡에 이 새소리의 음정들을 이용했는데, 이는 새가 곧 카톨릭적인 상징으로서 그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새소리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상징들을 만들어 썼는데, 대표적으로 '아기 예수를 향한 20개의 시선'에서 그는 10개가 넘는 상징적 음형들, 화음들을 만들어 썼다. 그리고 이 '상징들'은 항상 음악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청각적으로 인지되고, 음악적으로 작동하는 맥락을 만들어낸다(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음악적인 종교 상징들을 통해 구현해내는 맥락과 내용이 감동적이기 까지 하다).
다른 작곡가 지아친토 셀시는 이탈리아 작곡가로, 상당기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곡가였다(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마치 바흐의 멘델스존에 의한 재발견과 같이 '재발견'이라는 표현까지도 쓰인다). 그는 동양사상과 종교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로부터의 영향으로 동시대의 다른 서구 작곡과들과는 전혀 다른 어법을 구사했다.
그의 음악적 상징은 작품의 소리 자체, 그리고 구조에 있는데, 그의 작품에서 소리들은 동양의 음악들처럼 서로 묶이고 음향적으로 간섭하는 헤테로포닉한 성격을 띠며, 그의 작품의 구조는 분할/분절/분류에 따라 이루어지는 형식논리와는 전혀 다른 원리에 의해 구성된다.
일례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Anahit은 순환적인 구성으로 되어있다. 이 곡의 구조는, 주제가 발전되고 '회귀'하는, 또는 정반합적인 구조의 일반적인 서양음악 작품들과는 달리 '순환'하고 있는데, 이 순환의 마디는 부각되지 않아 분절이 일어나는 지점 없이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순환하게 되며, 그 불안하게 이어지면서도 느리게 이어지는 연속성은 분명히 동양적 세계관의 그것과의 닮음을 청각적으로 드러내준다.
모던의 작곡가들이 그렇게 무시하고 비난했던, 혹은 상당기간 존재조차 몰랐던 이들의 음악이, 지금 현재 20C의 작곡가들 중 가장 많은 작품이 연주되는 작곡가들 중 하나라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니라고 할 수 없겠는데, 여기서 더 큰 아이러니는, 그렇게까지 과거와 종교를 배척했던 합리주의정신의 시대에, 결과적으로 신비주의와 종교성을 가진 작품들이 그 가치를 증명하고 살아남았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작품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적 배경이기도 하여, 예술작품의 내용으로서는 또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 한계는 예술작품의 표현적 한계가 아니라, 감상자의 접근과 이해에 대한 장애로서의 한계이다.
예술작품은 독자적으로는 합당한 내용을 가질 수 없는가? 이 지점에 있어서는 물론 개개인마다의 생각이 다를 것이며, 그것이 옳고 그르디고 할 충분히 타당한 기준이나 근거를 세울 수는 없을 것이므로, 과한 언급은 삼가고자 한다. 그럼에도 메시앙이나 셸시와 같은 거장이 걸은 길을 통하여, 음악작품의 실제 작용하는 상징의 체계와 내용을세우는 방법을 더듬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무엇이 음악 안에서 작용하는 상징의 체계를 만드는가?
우선 둘 사이의 공통점은, 악곡의 형식이 내용(작품의 일종의 주제)와 괴리되지 않으며, 그렇다고 언어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고, 형식과 주제 사이의 닮음을 통하여 인지시킨다는 데 있다. 이는 작품의 상징과 내용이 인간의 추상능력을 통하여 경험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한 작품의 주제는, 음의 선택에서부터 작곡의 기법, 형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통하여 구현되고 드러내진다. 이는 마치 그 자신의 삶을 통하여 선을 드러내는 성인의 삶과 닮아있다. 성인은 악으로서 선을 구원하려 들지 않으며, 그 자신이 오롯이 선으로서 선을 세우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 결과로서, 일반적 삶의 실패—목표의 좌절이나 죽음 등—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선이 된다.
메시앙이나 셸시의 곡에서도 마찬가지인데—안타깝게 모든 곡이 그런 것은 아니다. 작곡가는 성인이 아니며 완벽하지도 않으므로.— 곡에 사용된 소재들, 작곡의 기법들, 때로 불완전해 보이는 형식의 원리들은, 모두 하나의 주제를 드러내기 의하여 선택되어진다. 분석 시 때로 나타나곤 하는 불완전하고 언어로 잘 설명되지 않는 소재나 형식은, 언어적 논리를 위해 실제가 희생되지 않은 결과이며, 그 자체가 또한 잘 작동하는 음악적인 상징으로 나타난다.
어떻게 보면, 전음렬음악과 같은 경우도 그 자체의 형식이 내용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것은 이성이나 합리의 추구에 따른 스타일이며, 그 소재나 형식 등도 이성적인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순서에 따른 반복은 '기계적'인 것으로서, '이성적'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그보다는 차라리 연주자의 '해석'이 살아있고 또한 요구되는 고전음악이 더 이성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연주자의 해석은 많은 경우 직관과 느낌을 따르기도 하나, 제대로 된 분석은 그것'만'을 따르지 않으며, 많은 분석과 양식 및 형식에 대한 이해를 수반한다. 이러한 기계적인 전음렬음악과 같은 경우는 인간이 작곡할 필요 없이, 지금도 컴퓨터의 알고리듬을 통하여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는, 전음렬음악은 사실 '이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기계성'을 드러내는 것임을 의미한다.
현대인은 물질문명과 전자제품에 친숙하다. 그럼에도 알아서 혼자 판단하고 알아서 수행하는 정도의 알고리듬 내지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기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여전히, 우리의 행위에 반응하고 종속적인 위치에 놓여있는 기계에만 친숙하다. 앞으로 사회상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쨋든 지금까지는 전음렬음악이 드러내는 '기계성'은 인간이 추구하는 바와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기계성'을 대안적으로 제시한 전음렬주의음악 또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내용을 가진 작품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술작품의 상징-내용에 관한 또 하나의 중요한 명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예술작품의 내용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있어 추구될만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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