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1
- seungyonkimcomp1
- 2018년 5월 1일
- 5분 분량

'나'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부정성 위에 세워져 있으므로 공허하다.
나의 범주는 타자의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므로, 타자는 내가 아니지만, 타자 없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
나의 경계가 불명확 혹은 그다지 강조할 필요가 없었던 시점, 물리적 존속이 자아감보다 중요했던 시기에서 나의 비어있음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속한 전체의 생존은 곧 나의 생존이므로, 자타의 구분은 오히려 물리적 존속을 위협한다.
반대로, 현대의 '나'들의 물리적 존속은 내가 속한 우리의 존속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나의 물리적 존속과 생존가능성은, 타자와의 차이에 기반한다. 특징 없이 타자와 동일한 나, '타자와 동일한 능력을 가진 나'는, 필연적으로 타자와 동질성을 이유로 경쟁하게 된다. 따라서 이질성이 생존의 위협이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오히려 동질성이 생존을 위협한다.
이는 큰 문제, 딜레마를 가져오는데, 나의 기반이 되는 타자는 나와 같은 범주의 존재로서 위험하다. 타자를 지워버리면 내가 소실되며, 타자를 남겨두면 위협받는다. 여기서 탄생하는 것은 간접적인 소통이다.
과거에는 그들이 속한 생존적 집단 내부에서 교류했다. 이제 사람들은 가족, 친지, 회사의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기를 원한다. 그들의 존재는 '나'의 생존에 직결되는 위협적인 타자이다. 그들은 '나'를 자신들과 같은 색채로 물들이려 하며, 이는 곧 나의 생존에 필요한 능력을 복제적이고 불필요한 것으로 퇴색시킨다. 과거에 비추어진 지식은 정보의 흐름에 빛을 잃으나, 그들은 '나'를 낡은 것, 무가치한 것으로 채우려고 시도한다. 정보의 사회에서 이미 누군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쓰레기에 다름아니다. 완전히 타자와 동일한 정보는, 생존에 필요한 자원으로 전환되기 위하여 또 다른 노력을 요구하며, 따라서 그들의 주장과 달리 나의 생존에 해가 된다.
오히려 나의 생존에 직결되지 않는, 외계의 타자는 '나'의 기반이 되면서도 생존을 위협하지 않는다. 그들은 생활의 직접적 반경 안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나에게 불필요한 정보를 강요하지도, 위협적인 동질화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흔한 가족 간의, 회사와 사회 구성원 간의 애증이나 벗어날 수 없는 증오에 의한 관계들과 달리, 위협을 느낄 때 언제든 관계를 단절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것들, 생존에 직결되지 않은 것들을 통해 타자와 교류한다. 과거의 사람들이 서로 모여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려고 했다면, 현재의 사람들은 흩어지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에 대안이 물질적 향유와 네트워크이다.
물질과 나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이질성의 간극이 존재하므로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내가 타자와 어떻게 다른가를, 그리고 지금 그것을 몸을 통해 향유하는 '나'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므로, 나라는 존재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네트워크는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지 않고 타자와 접촉하는 방식이다. 넷-워커들은 그들 사이에 취미와 관심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질성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그들 사이의 교류를 통해 '나'를 확보해주는 자극을 지속적으로 공급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감각을 유지한다.
이러한 양상을 포스트모던적 특징으로 꼽으며, 동시에 모더니스트들이 현대의 병폐로 지적하는 부분도 같은 지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포스트모던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 자체의 문제이며, 지금의 정치, 경제 체계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생기기 이전에 만들어졌다. 즉, 모더니즘이 이 병폐를 만들었다.
모더니스트들이 보기에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무지하고 무책임하다. 그러나 그들의 현실을 돌아보지 않은 것은 모더니스트들이다. 그들은 역사와 이론 등을 통해 틀렸음이 증명된 이성이라는 환상의 종교를 여전히 신봉한다. 그들이 이성이라 신봉한 것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물리적으로도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집어삼켰다. 그럼에도 모더니즘의 정신 혹은 망령은, 여전히 사회적 붕괴의 원인을 타자인 포스트모던에서 찾고 있다. 포스트모던을 그들의 전략인 논리게임의 장으로 다시 끌어들이며, 이성과 합리성은 그 마력을 통해 사람들을 유혹한다. 이 언어적 폭력성과 무책임성이 모더니즘의 본질이다.
키보드워리어들은 모던의 논리게임을 벗어나는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 모더니즘의 생존전략에 사로잡힌 이들이다. 그들은 비어있는 자아의 자리를 모더니즘적 사고, 논리게임을 걸고 우위를 점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여 파워를 획득하고 생존하려는 방식으로 채웠으므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때때로 이길 수도, 질 수도 있으나, 그들의 승리를 항구히 유지하는 방법은 없다. 논리는 형식이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내용과 상관없는 전술/전략적 승패만이 남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자기'가 취약해질 수록, 그들은 더더욱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만약 그러한 태도를 버린다면, 그들이 취한 자아상마저 잃어버리고, 그 자신이 비어있음을 곧바로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모더니스트들도 이와 같다. 모더니스트는 논리적이어 보이나, 그들의 실제적 비논리성은 그들이 그들의 논리를 통해 타자를 감화시키려 하고, 그러기 위해 논리게임을 시작한다는 데 있다. 그들의 논리 가운데 진실이 있을지라도 논리의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하나의 논리를 제외하고 비논리적인 것으로 판결지워진다. 그마저도 논리의 게임은 감정게임과 파워게임으로 전도되므로, 누구도 논리적일 수 없다.—우리는 이를 인간의 뇌구조 및 작동방식, 역사, 혹은 TV의 토론회와 국회청문회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그들의 목적은 논리를 통해 타자를 감화시키는 데 있으므로, 그들은 이 게임을 멈출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동질화시키려는 모더니즘과 모든 모더니스트들은 생존의 위협이다. 그들은 모더니스트들과 달리 논리의 게임을 하고있지 않으므로, 간단하게 그들을 현재에서 배제시켜버림으로써 생존을 계속할 수 있다. 사실은 이것이 침몰하는 모더니즘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모더니즘의 패배는,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 필요하다. 그들은 그 스스로 게임을 끝낼 능력이 없다. 유일한 구원의 순간은, 그들이 논리적으로 패배했음을 시인하는 순간에 있다. 현대 물리학의 진보는 그들이 정확한 관찰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중성과 확률분포 등을 수용하면서 일어났다. 현대물리학적으로 모든 것은 정확히 그 순간에 그렇게 일어나도록 세계가 프로그래밍 된 것으로 보지 않으며, 미시적일 수록 확률적으로 본다. 그들(현대물리학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모든 것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분야에 종사한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이성에 대한 환상은, 그들이 세운 이성을 통한 비전이 너무나 그럴듯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실패를 맞보기 전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지만, 많은 경우 실패 위에서도 그들의 환영을 변형시켜가며 유지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새로움이 가치를 가진 것은 모더니스트들의 논리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스트들은 그들에 보기에 잘못된 과거와 결별하기 위하여, 새로운 기치를 내세우고, 모든 인간적 잘못들을 과거로 밀어넣고, 모든 좋은 것들을 미래에 투사했다. 그들은 혁명가이자 예언자다. 그러나 그들이 예견했던 미래는 오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역할은, 모더니스트들이 모든 좋은 것들을 미래로 보내버려 황폐화시켜놓은 '현재'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성이라는 무기로 세계를 재단하여 기계화, 황폐화시킨 현재에, 다시 삶의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모던과의 비생산적인 싸움을 피하기위해, 포스트모더니스트들, 혹은 그렇게 불렸던 이들은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구분 조차 장막 너머로 던져버렸다. 그들은 일찍이 논리게임의 비생산성과 자기도취성을 파악하고, 더 이상 이 탐욕적인 게임에 종사할 생각이 없다. 그들은 모더니스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끌어들이는 논리 게임의 장을 무효화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 포스트모던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은 여전히 공허하다. '나'는 타자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모던이든 포스트모던이든, '나'라는 존재는 공허하다. 인류는 종교나 규범, 과거의 모범, 지식 등 모든 영역에서 '나'라는 존재를 그에 기대어 존속시키려는 데 있어 실패를 경험하였으며, 모던의 전략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기대는 것'이었다. 우리는 사회제도와 정치, 경제 등에 있어 또다시 실패들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그 실패로부터 배운 이들은 모더니즘을 믿지 않는다.(고로, 대학이라는 것의 붕괴도 즉각적이지 않더라도 필연적인 것이다. '인간의', 뇌의 작용의 한 종류인 이성은 근본적으로 맹신적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전에 단 한번도 믿었던 적이 없던 감각과 심리, 일시적 관심과 취향 등에 의지하여 자기를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너무나 순간적이고, 따라서 이들의 자아는 취약하다.
포스트모던과 모던이 애매하게 뒤섞인 상태 자체가 문제를 더 유발한다. 이제 더이상 타자는 '나'의 생존을 담보해주지 않음에도, 그들은 습관적인 생각을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포장 하에 강요한다. 그러나 그들 또한 단단히 싸 놓은 외피 아래의 취약한 자기를 회피하기 위하여 그 이성과 합리성의 이름으로 나의 삶의 붕괴로부터 도망치고 말 것이므로, 그들의 생각을 체화하는 것은 자기를 흙바닥에 내팽개치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러면 모던을 제거하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포스트모던의 문제는 '취약한 자기'에 있으므로, 그 자체는 모던과의 관계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나'를 인지시켜줄 무엇이 필요하며, 근본적으로 포스트모던은 모던의 상처에서 회복은 시켜줄 수 있을 지언정 항구적으로 유지시켜줄 수는 없으므로 또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그럼으로서 만들어지는 질문이 이것이다.
무엇이 나를 나로서 만드는가?
나는 누구인가?
2018.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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