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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범주와 내용에 관하여 2

  • seungyonkimcomp1
  • 2018년 5월 11일
  • 3분 분량

현재 예술로서 언급되는 분야들의 순수예술작품은 무엇으로써 예술임을 인정받는가? 현대의 예술은 예술이라는 범주 내부에서 출발하여 외연을 넓혀왔다. 따라서 그것이 가장 정신활동으로서의 의미가 가장 퇴색된 지점—단지 새로운 개념을 예술작품으로써 소개하는 것이나, 프로파간다로서 감상자에게 주장을 주입하는 것 이상의 어떠한 정신활동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지점들—에서도 그것들은 예술작품으로 불렸으며, 그것이—예를 들어 변기*가—미술작품인가 아닌가는 논의는 있어왔어도, 이미 예술인 분야에서, 이미 예술작품으로 언급되는 것들이 정신활동의 충분한 차원을 갖고 있는가는 그다지 논의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모더니즘이 그 자신의 문제를 떠넘긴 것이 타당한가 아닌가를 떠나서 예술에서 이것은 중요한 지점이며, 모던과 포스트모던, 순수예술과 대중예술, 자본주의 사이에서 급격한 외연의 확장으로 인해 예술의 내용이라는 지점이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이므로, 포스트모던의 입장에서도 이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다. 순수예술에 있어서, 무엇이 내용을 담보하는가?


일반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던의 예술작품은 충격을 의도하며, 그 자체가 내용이 된다. 뒤샹이 미술관에 변기를 내던지고, 다다이스트들이 알수 없는 말을 읊조리고, 퓨쳐리스트들이 사람들 사이로 뛰어든 것 등, 모더니스트들의 모든 지점에서 이러한 특성이 나타난다. 그것은 과거를 거부하며, 또한 다른 이들이게 이러한 관점을 선언으로써 내보인다. 그들의 작품은 이러한 사고를 위한 강제성을 의도하고, 충격을 통해 강제적으로 일상적인 사고의 궤도로부터 감상자를 밀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미학적 형식은 수많은 모더니스트들로부터 추구되고 찬미되며, 보호받아왔다.


뒤샹의 변기는 그 시대의 맥락에서 생각해볼 무언가 ‘메세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맥락에서도 의미있는가? 거리에서, 광장 한복판에, 벽과 길바닥에, 어느 담벼락 한귀퉁이에서도 예술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컴퓨터가 리듬과 코드를 만들어주고, 있는 그림을 잘라붙여 새로운 작품이 되는 시대에, 그것은 더 이상 어떠한 충격도 의아함도 아니며, 여기에는 더 이상 유효한 그 어떤 의미도 없다. 이제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기념비로서만 작동한다. 그것은 예술의 영역을 떠나 예술사로, 미술관을 떠나 박물관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거기에는 이제 사료적 가치 외에 어떠한 미적 가치도 없다.


이것의 매끄러운 버전이 바로 포스트모던의 대중예술이다. 그것은 말도 안되는 조합들의 향연이며, 끊임없는 새로움의 장이다. 만화책이 화회로 둔갑하고, 일렉트로닉과 자연미를 조합하며, 겉옷과 속옷을 뒤바꾸고, 순수와 팜므파탈을, 풋풋한 소년과 야성적 남성을 조합한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어떤 놀람도 만들어내지 않는 시점, 바로 유행이 지난 시점에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그것이 다시 불려나올 때, 그것은 새로움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사적인 추억으로서 재생된다. 그것은 지나간 시간에 따라 새로이 내포하게된 의미들을 담고 나타난다. ‘응답하라’는 격렬하면서도 다른 희망이 존재하던 시대가 어떻게 아련하고 말랑말랑하게 읽힐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토토가’는 걸그룹, 아이돌그룹의 풋풋함과 신선한 매력이 어떻게 노스탤지어로서 다르게 작용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새로움의 긴장은 말랑말랑한 추억으로 변환된다. 그것은, 그것이 얼마나 얄팍한가 이전에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뒤샹의 변기에는 의미가 남아있는가?


이 차이는, 팝한 노스탤지어는 그 자체가 최소한의 의미는 가지고 있을 지언정, 뒤샹의 변기가 가지는 의미는 순전하게 타자의존적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그것은 깨부술 대상이 있을 때에만 의미있다. 가장 독립적이어 보이던 태도는 사실 자기기만적인 의존성에서 비롯되고, 그것은 대립이라는 형태로 의지할 타자가 없어지는 순간, 그 자신의 어떠한 의미도 남기지 못한다. 그리고 지금, 현대예술, 적어도 현대음악계는 그 자신의 내용이라고 할만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내용적으로 완전히 투맹해지고 있다. 현대음악은 여전히 상투적으로 모던하거나 아니면 대중예술적이거나, 그도 아니면 과거의 것들을 답습하면서 그 자신의 어떤 내용, 그 자신에 의한 어떤 생명력도 없이, 말라비틀어지고 납작해지며, 모든 것이 다 비칠 정도로 엷어져 가고 있다.


순수음악, 순수예술은 그 자신의 내용을 찾아야 한다.


이는 미국의 현대예술계, 내지는 대학의 예술교육이 요구하는 ‘자신의 것을 찾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도식화된 방식으로만 기능한다. 한국작곡가=한국전통음악, 일본화가=우키요에과 같은 공식들이 존재하며, 이것을 수행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조차 자신을 모르는 것으로 낙인지워진다. 이것은 차라리 제국주의적이며, 예술의 내용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당연한 것은 아무런 정보도 없으며*, 따라서 정신활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식에 의한 것은 근세—르네상스나 바로크적이며, 그것은 아직 ‘기술’의 영역이지, 예술의 내용이 아니다.

(*정보이론 참조. 가능성이 1인 것은 정보량이 0이 된다. 당연한 것은 사고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자신의 내용을 찾는 것은 타자의 부정성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작품이, 맥락적 타자 없이 존재할 수 있는가? 맥락적 타자없이, 그것은 무엇으로 읽히는가? 이것이 예술작품의 내용에 대한, 그리고 내용을 위한 질문이다.


뒤샹의 변기는 당대의 미술계의 맥락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미술계의 관습 위에 존재하며, 미술계의 관습을 가울로 비춘 것에 불과하다.


어떤 현대의 예술작품이 내용을 타자를 포함하지 않고 그 자체로 드러낸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내용울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이것이 요구되는 영역들이 있다. 영화음악, 드라마음악과 같은 부수음악이 그것이다. 이 영역에서 음악은, 그 자체의 개성이 강할수록 거부된다. 그것은 영상에 대해 의존적이며, 때로 영상과의 충돌에 의해 다른 맥락적 내용을 가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영상없이 획득되지 않는다. 예로 스페이스오딧세이에는 슈트라우스의 왈츠가 삽입되어 있다. 대체 우주에 왈츠가 웬말인가. 그러나 그것이 영상과 부드럽게 충돌하며, 영상은 더 복합적인 내용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음악만 떼어 놓았을 때, 왈츠가 가질 수는 없는 내용이며, 이는 영상에 의존적이다.


그러나 여튼 이는 특수한 경우의 예이며, 일반적인 형식의 예술에서는 이와 달리 자신의 내용이 필요하다. 이 내용은 철학이나 미학으로 뒷받침되는 말로써 언급됨으로써 발생하지 않는다. 수많은 독일의 소음음악들이나, 존케이지의 4분33초와 같은 것들은 그것이 이무리 말로 그럴싸하게 포장되더라도 얼마나 공허한가. 그것들은 관습적으로 예술로서 인정받아왔기 때문에, 너무도 쉽게 무의미한 비예술적 이론을 남발한다. 이러한 언어적 속임수가 아닌, 그 자체가 실제적인, 개인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실존적인 내용이 필요하다.

이 예술작품의 내용이라는 것은, 개인이 그 자신의 실존적 삶을 만들어나가는 것과 유사하다. 개인적 실존의 차원에서, 의존적이지 않은 의식을 유지하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달성하기 어려운, 높은 단계의 명상의 기술이다. 사실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것, 타자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것은 현대인에게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모던의 메타내러티브와 포스트모던적 대처들은, 제대로 된 의식의 사고라는 것을 우리에게서 앗아가버리기 때문이다.


2018. 5. 11.


KR © 2018 김승연(Seungyon Kim). 출처 표기 인용 가능 /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N © 2018 Seungyon Kim. Quote with attribution. No reproduction or redistrib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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